▲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승정원일기 번역을 감수하는 오재환 연구원 ⓒ천지일보(뉴스천지)
실록과 달리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
[인터뷰] 오재환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암행어사 박문수는 사유서를 ‘의외로’ 자주 냈다. 이유인즉, 발언 순서가 한참 뒤인데도 대신들의 말을 끊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일에 대한 열정으로 마음이 앞선 그는 종종 영조의 추고를 받았다고.

이렇듯 승정원일기에는 위인전에서 볼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 영조 때 박문수가 사유서를 썼다는 이야기는 기록의 이곳저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사 박문수 이야기를 꺼내들며 허심탄회하게 웃는 오재환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그는 승정원일기를 번역하는 데 자문과 평가를 담당하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승정원일기는 무엇일까.

사실 일반인이 승정원일기를 그냥 읽기란 굉장히 어렵다. 당시 시대상 공식문서를 한문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인조부터 고종까지의 기록양이 방대하다. 평생 승정원일기를 붙잡고 있다 한들 완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터.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글 번역 작업을 해오고 있다. 현재 인조와 영조, 고종 때 기록을 주로 번역하고 있다. 인조와 고종 때의 각각 76책, 210책은 이미 번역이 완료됐다.

그렇다면 승정원일기는 언제부터 작성됐을까. 보통 시초를 세조 때로 보고 있으나 이는 짐작이다. 오 연구원에 따르면 인조(1623) 때의 기록부터 내려오고 있다. 영조 20년에 승정원에 이 나서 일기가 소실됐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영조에게 과거 언제부터 복원할지 물은 뒤 인조 때부터 복원하기로 했다. 각 부서의 기록을 다시 취합, 2년에 걸쳐 일기를 복원했다. 원본은 영조 때부터인 셈이다.

이따금씩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실록)과 비교되기도 한다.

“실록은 승정원일기의 축약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의 차이점은 편집이죠. 왕의 덕을 드러내기 위해 쓰인 실록은 정권이 바뀔 때 다시 작성되기도 합니다. 숙종 때 보궐실록이 만들어 진 것을 예로 들 수 있네요. 광해군 초본에는 ‘눈이 나쁘다’라고 기록됐는데 중초본에서는 ‘정신이 흐리다’라고 바뀌었죠.”

반면 승정원일기는 임금·신하·주서가 말한 내용만 적혀 매우 객관적이다.

주서는 한 치의 주관이 들어가지 않도록 공의공도를 지켜야만 했다. 이처럼 주서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당대 엘리트들이 선출됐다. 이들은 들은 즉시 한문으로 번역할 수 있는 ‘직독한역’ 능력을 갖춰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도 처음부터 완벽하지 못했을 터. 그래서 선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그날 일기를 완벽하게 작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해지자 승정원에서는 한 달 분량을 한 번에 편집했다”며 “알아듣지 못한 내용은 주서가 당사자를 찾아가 다시 듣고 적는 일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주서 1인칭관찰자시점으로 쓰인 승정원일기에서 주서 자신을 ‘천하다’라는 뜻을 지닌 ‘천(賤)’으로 표기했다. 자기 자신을 ‘천신(賤身)’으로 표현해 주서가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의 말글을 한문법으로 맞춰 작성됐다. 오재환 연구원이 속한 한국고전번역원은 이러한 승정원일기를 한글로 번역하고 있다. 오 연구원은 “승정원일기와 같은 고문서의 경우 한국어문법에서 볼 수 있는 주어 빠짐 현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며 “이러한 이유로 번역가들은 번역할 때 말했던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공부를 하고 최대한 센스를 발휘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어문법은 주어가 항상 있는데 기록에서 주어가 생략된 부분이 있어 정확한 의미를 아는 데 애매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괜스레 한반도가 기록강국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것은 아니다. 세세히 기록하기를 생활화했던 조선. 이러한 기록문화 덕분에 궐내와 조정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박문수와 같은 위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알 수 있다.

이미 완역된 실록에 뒤이어 승정원일기가 전부 번역이 된다면 또 다른 역사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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