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기행] 조선 여선비‧문학천재 ‘송덕봉’… 21세기 학계가 주목하는 이유
[인물기행] 조선 여선비‧문학천재 ‘송덕봉’… 21세기 학계가 주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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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전남 담양에 있는 미암박물관. 송덕봉의 남편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비롯해 유물을 관리하는 곳으로 2012년에 건립됐다. 2015년 미암박물관 내에 덕봉 도서관도 개관했다. 미암일기는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 동안 조정의 공적인 사무, 개인적 일상, 각종 보고서 등을 빠짐없이 기록돼 조선시대 개인 일기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본래 14책 중 현재 11책과 부록으로 그의 부인 송덕봉의 시문과 잡록이 수록돼 있다. ⓒ천지일보 2020.8.3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전남 담양에 있는 미암박물관. 송덕봉의 남편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비롯해 유물을 관리하는 곳으로 2012년에 건립됐다. 2015년 미암박물관 내에 덕봉 도서관도 개관했다. 미암일기는 1567년부터 1577년까지 11년 동안 조정의 공적인 사무, 개인적 일상, 각종 보고서 등을 빠짐없이 기록돼 조선시대 개인 일기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본래 14책 중 현재 11책과 부록이 전해진다. 미암의 부인 송덕봉의 시문과 행적도 미암일기에 기록돼 있다. ⓒ천지일보 2020.8.3

덕봉 송종개, 미암 유희춘의 부인
생전 개인문집 보유한 첫 여류작가
조선대 ‘덕봉집’ 발간 후 연구활발

“시어 사용 조선여류시인 중 최고”
홍주송씨 가문서 학습, 재주·덕 겸비
실천적 지식인… 남편과 ‘시’로 교류

“남편도 할 도리 다하시오” 당당함
진보적 평등의식·소양 학계서 주목

서울대 등 대학·연구원서 연구 발표

[천지일보=이미애 기자] “우리 조선조의 여성문인은 제법 많았지만 송덕봉(1521~1578)처럼 ‘재주와 덕성’을 겸비해 무리에서 빼어난 사람은 드물었다. 덕봉은 곧 미암 유희춘 선생의 부인이다. 부인은 난초와 옥과 같은 자태로 홍주 송씨 가문에서 생장해 문장에 능숙했다. 미암 유희춘(미암일기 저자)에게 시집가서는 부부가 잘 화합해 마치 비파와 거문고를 타는 듯했으며, 사랑하는 마음과 경계하는 뜻이 흔히 시문 사이에 넘쳐흘렀다.”

-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국역 ‘덕봉집’ 中

“16세기를 살다 간 양반가 여성 홍주 송씨, 송덕봉은 개인적으로 문집을 남겼으며, 일기 자료가 남아있다. 송덕봉은 경사(經史)와 시문(詩文)에 뛰어난 여사(女士, 여선비)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조카 송진을 통해 ‘덕봉집’이라는 시문집을 남겼으며, 그의 남편 유희춘이 작성한 미암일기에 행적이 소상히 드러나 개인적인 삶을 조망할 수 있다.”

- 이성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16세기 송덕봉의 삶과 성리학적 지향 中

덕봉(德峰) 송종개(宋種介, 1521~1578)는 2012년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이 송덕봉의 사상과 시문학 세계를 담은 ‘덕봉집’을 발간한 이후 주목받는 16세기 조선 중기 여성이다.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동시대를 살다간 송덕봉은 허난설헌과는 개인적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덕봉은 당대에 ‘총명하고 민첩하며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한 여사(女士, 여선비)’로 평가받았다. 가정경영과 부부생활로 볼 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을 구현했다. 아울러 여성문학사에서 가장 먼저 개인문집을 보유한 여성이자, ‘미암일기’를 통해 문헌적 근거가 있는 여성 지식인사의 선두주자다.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미암박물관 입구에 미암과 덕봉이 주고받은 시비. 미암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하겠다”고 하자 덕봉이 “사내대장부가 책 속에만 빠져 살려느냐”며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일침하는 내용이다. ⓒ천지일보 2020.8.3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미암박물관 입구에 미암 유희춘과 아내 송덕봉이 주고받은 시를 비석으로 만든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미암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하겠다”고 하자 덕봉이 “사내대장부가 책 속에만 빠져 살려느냐”며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일침하는 내용이다. ⓒ천지일보 2020.8.3

최근 덕봉의 한시(漢詩)와 편지 등을 연구한 학자들은 “신사임당, 허난설헌, 송덕봉 가운데 시어(詩語) 사용이 가장 뛰어난 이가 송덕봉”이라며 문학천재에 가깝다는 평을 하고 있다. 덕봉의 시문은 정교하면서도 고아한 멋을 지녔다. 덕봉은 또 노비에게 가창(歌唱)을 가르치고 해금(奚琴)을 배우게 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그러나 덕봉이 시집간 선산 유씨 가문은 미암 유희춘 이후로는 문과(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없다. 이런 이유로 신사임당, 허난설헌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덕봉은 남편 미암 유희춘이 21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성리학적 덕을 완벽하게 실천했다. 그러나 자신이 하듯 남편에게도 ‘할 도리를 다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이같은 ‘양성평등의식’은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처럼 당차면서도 완벽한 가정모델을 이뤘던 덕봉의 삶은 남녀갈등의 해법을 모색하는 학자들의 관심도 끌고 있다. 실천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지식인 ‘송덕봉’에 관한 연구는 한문학, 역사학, 여성사, 사회학 분야에서 두루 진행되고 있다. 또 송덕봉과 동시대를 살았던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여류문인들과의 비교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본지는 덕봉집 발간에 참여했던 오석환 충남대 교수를 비롯해 노기춘 미암박물관장, 송창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담양예총회장 등의 도움을 받아 21세기에 주목받는 16세기 조선 여성 송덕봉의 시문학 세계와 생애를 재조명했다.

[천지일보 담야=이미애 기자] 미암박물관내에 전시된 덕봉집. 미암일기에 기록된 덕봉 송종개의 한시와 편지 등을 모아 2012년 조선대 고전연구원에서 번역 출간했다. 덕봉 생전에 덕봉의 시 38수를 모아 남편 유희춘이 아내에게 덕봉집을 선물했으나 전하지 않는다. ⓒ천지일보 2020.8.4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미암박물관내에 전시된 덕봉집. 미암일기에 기록된 덕봉 송종개의 한시와 편지 등을 모아 2012년 조선대 고전연구원에서 번역 출간했다. 덕봉 생전에 덕봉의 시 38수를 모아 남편 유희춘이 아내에게 덕봉집을 선물했으나 전하지 않는다. ⓒ천지일보 2020.8.4

◆‘여류문사(文士)’ 송덕봉의 생애

홍주 송씨 송덕봉(宋德峰)의 이름은 종개(種介), 자(다른 이름)는 성중(成仲), 호는 덕봉(德峰)이다. ‘종개’라는 이름 대신 ‘덕봉’이라는 호가 널리 알려져 있다. 1521년(중종 16) 12월 20일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덕봉’이라는 호는 담양군 장신리에 있는 덕봉(德峰)에서 유래했다. 덕봉 부부는 덕봉 아래서 살았다. 현재는 이곳에 미암박물관이 있다. 미암일기(보물 260호)를 저술한 남편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이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이다.

덕봉은 1536년 16세 되던 해 해남 출신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 혼인했다. 미암의 나이 24세였다. 덕봉과 미암의 나이 차는 8살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1538년(덕봉 18세, 미암 26세) 결혼 3년 만에 미암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다. 그러나 둘의 단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1545년(덕봉 25세, 미암 33세) 미암은 문정왕후가 윤원형에게 내린 밀지의 부당함을 논박하다 백인걸, 김난상 등과 함께 파직당한다.

2년 뒤인 1547년(덕봉 27세, 미암 35세) 결혼 11년 만에 미암은 을사사화(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돼 21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원래 제주도로 유배됐으나 고향과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됐다.

덕봉은 이때 자신의 패물을 팔아 14살의 첩을 미암에게 딸려 보낸다. 덕봉은 남편이 유배생활 동안 첩 사이에서 낳은 4명의 딸도 자신의 딸처럼 잘 다독여 가족 질서에 편입하고자 했다. 유희춘은 이런 모습에 감동해 아내를 당나라 문종 때 효성으로 뛰어난 상곡부인(上谷婦人) 같다고 표현했다.

덕봉은 남편의 유배생활 동안 홀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른다. 이런 모습이 18, 19세기에는 당연했지만 16세기 조선 중기에는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 혼례를 올리고 처가살이를 하는 풍습이 보편적이었다.

즉, 딸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시대였고 덕봉 역시 결혼 후 담양에서 계속 부모를 모시고 살았고,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집과 전답을 물려받고 조상의 제사를 주관했다. 그러함에도 덕봉이 시어머니 최씨를 모셔다 지성으로 봉양해 감동한 최씨가 유배지에 가 있던 미암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덕봉은 남편 유배에 따른 자녀 교육과 집안의 대소사와 재산관리는 물론 시부모, 친정 부모, 남편, 자녀, 친족, 빈객, 첩,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에서 최선의 지혜와 사랑을 베풀며 이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이처럼 성리학적 덕을 완벽히 실천한 덕봉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1560년(덕봉 40세, 미암 48세)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른 뒤 덕봉은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전남 담양에서 귀양지 함경도 종성까지 무려 860km 거리를 홀로 찾아가 남편과 함께 유배생활을 견디었다. 유배지를 찾아가면서 쓴 시가 바로 널리 알려진 ‘마천령상음(마천령 위에서)’이다.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2012년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이 발간한 국역 덕봉집(왼쪽). 2017년 12월 15일 담양군 주최 ㈔한국학호남진흥원의 주관으로 진행된 ‘조선의 여류작가 송덕봉의 삶과 문학’ 학술대회집(가운데). 학술대회에서는 안동교 해동문헌연구소장의 ‘송덕봉의 생애와 시문활동’ 기조강연 외 서울대 김수희 교수의 ‘16세기 한중 여성문인의 비교-송덕봉과 황아를 중심으로’ 등 전국 대학 교수 6명의 발제가 진행됐다. ⓒ천지일보 2020.8.3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2012년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이 발간한 국역 덕봉집(왼쪽). 2017년 12월 15일 담양군 주최 ㈔한국학호남진흥원의 주관으로 진행된 ‘조선의 여류작가 송덕봉의 삶과 문학’ 학술대회집(가운데). 학술대회에서는 안동교 해동문헌연구소장의 ‘송덕봉의 생애와 시문활동’ 기조강연 외 서울대 김수희 교수의 ‘16세기 한중 여성문인의 비교-송덕봉과 황아를 중심으로’ 등 전국 대학 교수 6명의 발제가 진행됐다. ⓒ천지일보 2020.8.3

마천령 위에서(磨天嶺上吟)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이르니 行行遂至磨天嶺

동해는 거울처럼 가없이 펼쳐있구나 東海無涯鏡面平

부인의 몸으로 만 리 길 어이 왔는가 萬里婦人何事到

삼종의리 중하니 이 한 몸 가벼운 것을 三從義重一身輕

최북단 고개 마천령 위에서 쓴 시 속에는 길고 험난한 인고의 여정을 감행한 복잡한 심리적 상황과 유교적 덕목으로 재무장해 수신해야 하는 명분이 절절히 드러난다. 부인의 몸으로 아무리 힘들더라도 삼종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구절은 당대 조선 사대부가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투영해 뭇 성리학자들을 탄복하게 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1567년(덕봉 47세, 미암 55세) 선조가 즉위하자 미암이 복직하게 된다. 1567년 10월에 복직한 유희춘은 가족도 못 만나고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했고, 11월에 특별휴가를 받아 고향에 내려와 가족과 상봉했다. 일 년 뒤인 1568년 9월 덕봉은 딸과 사위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1569년 9월까지 1년간 미암과 함께 지냈다.

1570년 미암은 홍문관 부제학까지 벼슬이 올랐으며 덕봉은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1571년 3월 덕봉의 나이 51세 되던 해에 미암은 처조카 송진을 시켜 덕봉이 지은 시 38수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문집 ‘덕봉집’을 선물했다. 아쉽게도 덕봉집은 전하지 않지만 미암일기에 약 25수가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다. 1578년 덕봉은 남편 미암이 사망한 이듬해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미암박물관 전경. (제공: 미암박물관) ⓒ천지일보 2020.8.4
미암박물관 전경. (제공: 미암박물관) ⓒ천지일보 2020.8.4

◆문학적 토양이 된 가문과 가족문화

호남 명문가로 꼽히는 홍주 송씨 가문은 학문과 시문에 힘쓰면서 꾸준히 관직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 즉위 후 시행된 조선 첫 과거시험에서 송개신이 문과 장원급제를 한 것을 비롯 조선시대에만 총 21명(문과 5명, 무과 6명, 사마시(생원‧진사) 10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

임진왜란 의병장 해광 송제민의 사위, 석주 권필(1569~1612)이 쓴 ‘해광공유사’에는 “(홍주 송씨는) 자녀 교육을 매우 엄격히 해 여자라도 열 살이 되면 반드시 소학‧효경‧열녀전을 통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당시 여성도 가르쳤다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고려 말 문하시중(현 국무총리) 송계(宋桂)를 시조로 하는 홍주 송씨는 중시조 송평 때 홍주(現 충남 홍성)에서 전남 담양으로 이거했다. 중시조 송평의 아들이자 덕봉의 할아버지 송기손(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이 효령대군(세종대왕의 둘째형)의 손자 보성군 이합의 딸과 혼인하면서 집안이 조선왕실과 혼인관계를 이뤘다. 왕가와 혼인한 집안을 국반이라 부르며 특권층에 속한다.

홍주 송씨는 송기손의 아들 준(駿, 이요당공二樂堂公), 숙(驌, 우유당공優遊堂公), 구(駒, 청심헌공淸心軒公) 때 세 갈래로 갈라져 가세를 일으켰는데, 덕봉은 이요당 송준(宋駿, 사헌부 감찰)의 딸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덕봉의 ‘착석문(斲石文)’이나 한시 속에서 경서와 고사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유교 경전과 고사, 작문 수업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호민(李好閔)과 허성(許筬)도 덕봉이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외가의 문학적 기질도 덕봉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외할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함안 이씨 이인형(李仁亨)으로 매창월가(梅窓月歌)라는 가사작품을 지었는데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과 더불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은일가사로 평가된다. 여기에 기록의 달인 미암 유희춘과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덕봉의 뛰어난 한시, 편지와 행적이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미암과 결혼 후 덕봉의 가족은 시회(詩會)를 겸해 가족모임을 자주 한 것으로 보인다. 기념이 될 만한 날에 작은 잔치를 열고 유희가 무르익을 무렵 운자를 주고받으며 시를 완성해 공유하는 격조 높은 가족문화를 형성했다.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송창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담양예총회장이 덕봉집을 들고 송덕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 회장은 “송덕봉은 문헌적 근거가 뒷받침되는 우리나라 여성지식 인사의 선두주자로 당대에 이미 성품이 명민하고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했다는 평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천지일보 2020.8.3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송창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담양예총회장이 덕봉집을 들고 송덕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 회장은 “송덕봉은 문헌적 근거가 뒷받침되는 우리나라 여성지식 인사의 선두주자로 당대에 이미 성품이 명민하고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했다는 평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천지일보 2020.8.3

◆“남편도 도리 다하시오” 당찬 여선비

송덕봉은 사대부 종가의 며느리로, 유교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집안의 대·소사와 제사를 성실히 이행하고 현모양처로 완벽한 덕행을 실천했다. ‘여사(女士)’는 여자 중에 선비의 행실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덕봉은 미암에게 삶의 긍정적인 훈시(지혜와 교훈)를 줬다. 이러한 내용이 미암일기에 자세히 기록돼있다. 미암은 덕봉을 지음(知音)이라 불렀고 어떤 일이 있을 때 덕봉과 상의해서 처리했다.

덕봉은 남편을 꾸짖거나 충고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질책의 바탕에는 남편과 대등한 입장에서, 그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덕봉 스스로 유교적 도리를 체화하고 실천하는 것에서 나오는 긍지가 서려 있다.

미암일기초에 수록된 답미암(答眉巖)은 1570년 미암이 홍문관 관리로 한양에서 벼슬하면서 4개월 동안 일체 여색과 음악을 가까이하지 않음을 자랑하자, 이를 질책하면서 시작한다. 덕봉은 성현의 가르침을 절대적 기준으로 “군자라면 결코 자신의 선행을 과시하지 않는 법”이라면서 일침을 가한다.

또 “과연 아내에게 뻐기고 자랑할 무슨 공이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미암은 일기에서 “부인이 장문의 편지를 적어서 광문(光雯 미암의 종손자)을 시켜 베껴 보냈다”며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덕봉은 “비석을 세워달라”는 친정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해 홀로 근심하며 잠들지 못한 날이 많았다. 이에 남편 미암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남편이 비석 얘기는 빼고 “친정 형제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에 분통이 터진 덕봉은 “내 아버지상(喪)에 상주 노릇 제대로 했냐, 나는 시어머니 장사와 제사에 유배 중인 당신 몫까지 마음과 힘을 다해 모신 걸 알고 있느냐, 이래서야 지음(知音)으로 같이 살 수 있겠냐”며 서운함을 보인다. 이 편지를 받은 미암은 덕봉의 의견에 동의해 착석문(斲石文)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기록돼 있다.

주고받은 시에선 부부의 위트도 엿보인다. 미암이 먼저 ‘婦人出戶鼻先出(부인출호비선출, 부인이 문 밖에 나감에 코가 먼저 나가더라)’하며 부인의 콧대가 세다는 뜻을 전하니 덕봉이 화답하기를 ‘夫君行路纓掃地(부군행로앵소지, 남편이 길을 다님에 갓끈이 땅을 쓸더라)’며 미암이 키가 작음을 지적하며 맞받아친다.

‘미암’과 ‘덕봉’은 격조 있는 부부관계로 인문학의 정서를 공유하는 동료이자 생의 동반자로서 시대를 초월한 모범적이고 완벽에 가까운 가정의 모델을 보여준다. 덕봉은 미암이 책을 저술하는데 있어서도 교정은 물론 글에 대해서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을 정도로 학문적 역량과 식견이 대단했다. 훗날 미암이 선조의 글을 가르치는 대학자로 성장하는 배경에도 덕봉과 처가의 도움이 적지 않았음을 미암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덕봉의 한시 작품은 미암일기에 기록된 것으로 대략 25수다. 한시의 내용은 유교적 부덕(婦德)을 실현한 시, 부부 수창과 남편을 대상으로 읊은 시, 가족애를 표상화한 시, 잠재된 욕망을 표출한 시, 호방한 여성의 하루가 표현된 시들이다.

산문으로는 한문편지인 답미암(答眉巖)과 착석문(斲石文)이 있다. 마천령상음(磨天嶺上吟) 희신사시(喜新舍詩) 증미암(贈眉巖) 취리음(醉裏吟) 헌화미암운(獻和眉巖韻) 등의 한시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전남 담양군 미암박물관 앞 모현관. ‘담양 모현관’은 보물 제260호로 지정된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목판’을 비롯해 미암 선생과 덕봉 부부가 읽던 고적을 보관했던 일종의 수장시설로 1957년 후손들이 주도해 건립한 건축물이다. 화재와 도난을 우려해 연지 한복판에 부지를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 국가등록문화재 제769호로 등재됐다. ⓒ천지일보 2020.8.3
[천지일보 담양=이미애 기자] 전남 담양군 미암박물관 앞 모현관. ‘담양 모현관’은 보물 제260호로 지정된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목판’을 비롯해 미암 선생과 덕봉 부부가 읽던 고적을 보관했던 일종의 수장시설로 1957년 후손들이 주도해 건립한 건축물이다. 화재와 도난을 우려해 연지 한복판에 부지를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 국가등록문화재 제769호로 등재됐다. ⓒ천지일보 202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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