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중. (사진출처: 올뎃시네마)

 

거장의 101번째 선택 ‘한지’

[천지일보=이현정 기자] 100번의 완성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을 알린 임권택 감독의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한지를 소재로 한 임 감독의 101번째 작품인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 감독 스스로 새로운 데뷔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전 100편과는 다른 느낌의 영화로 이목을 쏠리게 하고 있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제작에 나서면서 ‘숏!숏!숏!’ 프로젝트에 이은 새로운 프로젝트로 볼 수 있다. 송하진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이 임 감독에게 101번째 영화의 소재로 ‘전주한지’를 제안했고, 임 감독이 흔쾌히 응하면서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가 탄생됐다.

임 감독은 2년 동안 전주 전역의 아름다운 장소를 직접 답사하고 한지 장인과 한지 관련 종사자들을 만난 후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답사와 탐방을 통한 철저한 고증과 함께 전통한지 작업 재현을 위해 한겨울 차가운 물속 촬영을 강행했다.

여기에 최초의 디지털 작업으로 완성한 화면 가득 달빛이 넘쳐나는 영상미학이 더해져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배로 느끼게 한다.

임 감독은 영화 크랭크인에서 “한지와 관련된 취재 여행을 하면서 그 매력에 빠졌는데 비단은 오백 년밖에 못 가지만 한지는 천 년을 간다는 옛말처럼 좋은 종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면서 “수백 년의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요즘 우리 전통문화의 가치를 제대로 다루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시청 공무원 필용(박중훈 분)과 그의 아내 효경(예지원 분),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 분)이 임진왜란 때 불 타버린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 보관본을 전통한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얽히고 부딪히며 이해하는 과정을 그렸다.

 

▲ 임권택 감독. (사진출처: 올댓시네마)

 

한 가지에 미친, 그래서 조금은 유별나지만 그렇다고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사람들과 달빛을 머금고 천 년 세월을 숨 쉬는 우리나라 종이 한지가 전하는 한 편의 드라마다.

여든을 바라보는 감독이 그간 10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세계 영화사에서도 전례 없는 경이로운 기록이다.

한지에 대한 선호도가 점차 낮아지면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까지 흔들리는 오늘날 최고의 종이를 재현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물속의 달빛을 취하려 하는 무모한 열정과 다름없다고 여기는 임 감독.

세계에서 가장 질기고 오래가는 한지와 우리네 정서를 101번째 영화로 선택한 임 감독의 가치관은 또 한 번 세계에 ‘우리 것’을 알리기 위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21세기 한지, 한지, 한지!

우리나라 고유의 종이, 한지는 ‘닥나무’ ‘삼지나무’ 껍질로 만들어져 질기고 수명이 길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제작시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아직 학계에서도 통일신라 혹은 고려 때 인쇄된 것이라는 논란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경서에서 당나라 측천무후 집권 시 사용됐던 무주제자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704년~751년 사이에 만들어진 세계최초의 목판 인쇄물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때 사용된 종이가 바로 닥종이 즉 한지인데 1966년 10월 불국사 석가탑에서 최초 발견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다라니경은 1200년의 오랜 수명을 자랑한다.

즉 한지의 질기고도 긴 수명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례로써 우리 선조의 제지 기술이 훌륭하다는 것을 나타낸 결과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임금님 진상 품목에 전주한지가 빠지지 않았고, 외교문서와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에 쓰일 정도로 용도가 매우 다양하고 귀한 것이었다.

완판본, 전주한지산업의 발달이 가져온 문화현상

조선시대에는 교통이 편리하고 한지의 원재료인 닥나무가 풍성해 좋은 환경적 여건을 갖춘 전주가 한지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경상도와 함께 한지의 70~80%를 생산하고 있었으며, 전북에서 전국 40%에 해당하는 한지를 생산했다.

전주가 종이생산으로만 그 역할을 그쳤다면 오늘날만큼의 위상과 명성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주는 교통이 좋고 전라감영과 큰 시장이 한 자리에 있어 전라남북도와 제주 상인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고, 종이가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종이생산과 더불어 전주 남부시장에서 판매와 유통이 함께 이루어지면서 출판인쇄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완판본이 시장에 유통되면서 지식 산업의 문화가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완판본은 전주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국문소설 등을 총칭하는 조선시대 책을 일컫는 용어다.

이태영 전북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는 “종이생산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출판산업의 발달로 이어져 문집, 족보나 교양서·의서·옥편·천자문·통감 등이 주로 인쇄됐다”며 “자본을 통해 서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지역민들이 서적을 통해 지식을 접하게 되고 이들이 시대적 개화에 일조하게 되는 등 종이의 발달은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찍어내던 경판본과 전주에서 간행하는 완판본이 있었는데 활자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고전 소설들이 전역에 퍼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경판본과 완판본이다.

또 이를 들고 나르던 전국 장사꾼들의 수고도 빠질 수 없는 요인 중 하나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이 말하는 선조의 장인정신

<달빛 길어올리기>의 주 내용인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 복본화’ 사업은 실제 전주시에서 2009년 4월부터 진행하고 있으며 2012년 완료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조선 태조 대에서 명종 대까지의 실록 총 804권 613책을 복본하는 것.

복본 작업은 전통한지와 비단, 장지표지의 제작과 장정 등의 제반 과정을 전통적 기술방법으로 재현해야 하며 인쇄만 현대 인쇄기술을 도입하여 진행한다.

그런데 이 전통한지의 기준을 맞추는 것이 매우 까다롭고 정교해 우리 조상의 한지 제작기술의 우수성과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김장곤 전주시청 한스타일관광과 한지계 주무관은 “실제 조선왕조실록의 한지와 근접한 물성검사를 위해 그에 해당하는 성분검사에 합격이 돼야만 복본화 사업에 쓰일 수 있는데 그 기준을 맞추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라며 “열정이 있어야 이번 복본화 사업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조선왕조실록 복본용 전통한지 품질기준이 까다롭다는 뜻이지만 역으로 우리 선조의 한지에 대한 장인정신과 한지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 전주한지문화축제 중 한지 패션쇼. (사진출처: 전주시청)
지금은 한지시대?

 

우리나라 지자체 중에선 유일하게 전주시청이 한지계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전주시는 ‘살아 숨 쉬는 과학,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를 담은 천년 명품’이라고 한지를 소개하며 한지산업진흥원을 건립하는 등 무한한 한지 사랑을 보이고 있다.

특히 UN한국대표부와 사무총장 관저를 한지로 꾸미고 튀니지 국립도서관 고문서 복원에 전주한지를 사용하는 등 한지홍보대사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정상택 전주시 한스타일관광과 한지계장은 “한지산업의 부활을 위해 전주한지는 전통문화적 요소와 기능은 그대로 고수하면서 첨단기능을 첨가해 새로운 문화창출에 노력하고 있다”며 “일상화·산업화·세계화를 통해서 한지의 쓰임새를 늘려나가는 일에 주력하기 위해 세계박람회 참석, 한지산업지원센터 건립 등 역량을 강화시켜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지의 생산과 유통은 비단 문서용으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요즘은 웰빙제품으로 양말· 베개·인테리어 등에도 한지를 사용하는데 최근에는 한지를 소재로 한 패션쇼도 개최되기 시작하면서 한지의 사용도가 무한대로 늘어나고 있다.

특히 매년 5월 초 전주 한옥마을 일대에서 열리는 ‘한지축제’에서는 한지의 다양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 트렌드에 발맞춘 한지 패션쇼가 일품이다.

특히 패션쇼는 파티의상, 실용의상, 무대의상, 한복의상에서 웨딩드레스까지 의상을 통한 전주한지의 우수성과 전통성이 관객과 디자이너에게 신소재로 다가설 기회를 제공한다. 

한지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통한 경제적 가치실현과 한지 문화와 전통의 승계, 홍보를 위해 마련된 전주한지문화축제는 개·폐막식과 한지공예대전, 학술세미나, 전시행사 등의 프로그램으로 오는 5월 5일부터 8일까지 전주한옥마을 일원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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