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로가에서 보면 홍지문ㆍ오간대수문ㆍ탕춘대성이 이어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성문 우측 오간대수문, 조선시대 치수정책 보여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옛 서울에는 도성을 중심으로 4산에 둘러진 4대문과 4소문 그리고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성과 성문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 북서쪽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쌓은 성곽이 있으니 바로 ‘탕춘대성’이다. 또한 성에 딸린 문이 ‘홍지문’이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던 지난 24일 ‘홍지문과 탕춘대성’이라고 누차 함께 불리는 그곳을 찾아 나섰다. 버스를 타고 내려 5분 여 걸었을까. 도로가에 노출돼 외롭게 버티고 서있는 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문루가 시선을 잡더니 가까이 갈수록 아치형 문이 길을 내어주는 모습에 당장 걸음을 재촉했다.

길을 따라 성문에 들어서니 구름 문양의 단청이 눈에 띈다. 홍지문의 아담하고 예쁜 아치형 월단(月團)은 방어시설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소소하고 아담했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 사각지대인 지형에 맞게 두 성 사이를 이어 성벽을 만든 것으로 관문성의 성격을 지녔다.

山 경사로 군량 운반 어려워

▲ 위에서부터 홍지문ㆍ탕춘대성ㆍ오간대수문 순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방어 성곽 겸 탕춘대성 축성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방어시설로 북한산성을 축성했다. 그러나 높은 지형으로 군량 운반에 어려움이 있어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 일대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을 저장하기 위한 탕춘대성을 세우게 됐다. 세검정 부근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상 가장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1715년(숙종 41)에 중건돼 성문의 역할을 해오다 1921년 홍수로 붕괴되면서 50여 년간 방치됐었다. 이후 1977년에 탕춘대성과 함께 복원됐다. 또한 홍예 위로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문루를 지었는데, 대개의 성문처럼 우진각지붕이다.

1976년 6월 23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홍지문은 한성(백제의 도읍지)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홍지문’이라고 불린 것은 숙종이 하사한 친필 ‘홍지문(弘智門)’ 편액을 달면서 부터로 알려졌다.

도로 내준 홍지문 좌측 성곽
왼팔 잘려진 쓸쓸함 느껴져

현재 홍지문은 현판을 기준으로 좌측은 모두 없어졌다. 산을 깎아 도로가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측에는 수문이 하나 있다.

‘오간대수문’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도성의 물길을 고려해 높이 5.23m의 아치형 홍예문을 5개 내어 홍제천의 물을 흐르게 한 시설로, 조선시대 중요한 치수정책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탕춘대성의 성곽 둘레는 인왕산 정상에서 수리봉까지 이어진 약 4km다. 당시 성안에는 연무장인 연융대가 있었으며 군량창고 등을 갖췄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벽은 크기가 고른 정형의 돌로 반듯하게 쌓아 올렸는데 이는 숙종 때 성을 쌓았던 기법과 일치한다.

건립 당시에는 북한산성의 방어 요새였던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현재 인근 대학 학생들의 원룸 이동길로 이용되고 있으며, 도로 옆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역사의 현장임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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