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현지시간) 상파울루의 중심가 아베니다 파울리스타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14일 오후(현지시간) 상파울루의 중심가 아베니다 파울리스타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더는 숨을 쉴 수가 없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본격적인 겨울철을 앞두고 제법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옅게 뿌리는 14일 오후(현지시간). 브라질 최대 도시 상파울루의 중심가 아베니다 파울리스타에 있는 상파울루미술관(MASP) 앞으로 오후 2시께부터 깃발을 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요 언론과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이미 예고된 대로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퇴진과 민주주의 수호를 촉구하는 시위 참가자들이다.

대열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지도부의 신호에 따라 맨 앞 열에 있던 마스크 쓴 시위대가 무릎을 꿇었다.

미국 경찰의 과잉 제압으로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며 "숨을 쉴 수가 없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의 손에는 브라질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경찰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사진이다.

브라질 정부가 최근 2019년 인권상황을 담은 연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경찰 폭력에 의한 사망자를 뺀 데 대한 항의의 뜻을 표시하려는 행동이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비난하는 의미도 담겼다.

참여 인원이 불어나자 오후 3시께부터 거리행진이 시작됐다. 1㎞ 남짓한 행렬에서는 '보우소나루 퇴진' '인종차별·파시스트 반대'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등 다양한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름을 카치아라고 밝힌 한 여성은 '인종차별 반대'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어 보이며 "미국 못지않게 브라질에서도 인종차별 문제는 심각하다"면서 "모든 브라질 국민은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성향 시민단체 자유브라질운동(MBL)의 회원이라는 한 여학생은 "보우소나루는 파시스트"라면서 "브라질 사회는 인종차별주의자인 파시스트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위대는 브라질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아졌다는 보도에 분노하면서 보우소나루 정부를 질타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와 민병대, 파시스트 물러가라!'는 주장을 담은 플래카드를 든 아우베르투라는 노인은 "코로나19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시위 현장에서 손 소독제를 나눠주는 의사와 의과대학생들을 가리키며 "코로나19가 무섭지만, 파시스트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날 시위에는 좌파 정당과 각 분야의 시민단체 회원, 대학생 등이 참여했다. 지난 주말 시위에 이어 일부 프로축구팀 서포터스들도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시위대의 거리행진이 이어지는 동안 도로변 아파트 주민들이 냄비를 두드리며 호응했고, 시위대와 주민이 서로 박수를 보내며 격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날 시위는 상파울루뿐 아니라 전국 27개 주 가운데 최소한 18개 주에서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벌어졌다고 브라질 언론은 전했다.

최근 시위를 두고 2013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 상황을 떠올리는 전문가들이 많다.

당시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반대하며 시작된 시위는 부패 척결과 공공 서비스 개선, 복지·교육에 대한 투자 확대 등을 요구하는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확대됐다.

이후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정부에 대한 여론의 평가가 급추락하면서 정치적 위기 상황이 조성됐고, 결국에는 2016년 호세프 탄핵 사태를 이끈 원인의 하나가 됐다.

현재의 '민주주의 수호' 시위가 아직은 아베니다 파울리스타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비교적 견고한 지지 기반을 유지하고 있어 시위 규모 확산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갈수록 '반 보우소나루'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정부 내에서도 2013년 상황이 재현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으로 전해졌다.

(상파울루=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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