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지나갔고, 또 몇 날이 지나면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스승’이라 함은 자기를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을 일컫는 고귀한 단어다. 세상이 혼탁해져 갈수록 잊지 말아야 할 단어가 바로 스승이라는 단어다.

특히 우리 민족은 예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려 져 왔으며,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배워왔다. 그만큼 스승은 자신에게 있어 하늘만큼 위대하고 귀한 분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언젠가부터 스승에 대한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하며 심지어 스승을 모독하는 현실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다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마음 한구석에 남기고 싶다.

스승이 회초리를 들 때면 왕이라 할지라도 순종해야 했던 우리민족만이 지니고 지켜왔던 고귀한 문화가 있었고, 그만큼 스승의 지위는 그 무엇보다 위대했다.

그러했던 스승의 지위가 언젠가부터 바닥을 치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이며 억지일까. 흔히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고 한다. 가장 위대해야 할 스승의 위상이 바닥을 쳤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해 갈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 중에 하나는 교권 즉, 스승의 지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깊이 생각해 볼 것은 세상의 교권이 무너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바로 하늘의 교권 즉, 종교(宗敎)가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생각과 정신과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 영(靈)이라면 우리의 영성(靈性) 곧 종교성이 무너지고 파괴됨으로 세상의 교권은 자동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순리적 현상에 의해 세상은 흔히들 습관처럼 말하는 말세가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교권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늘의 교권 즉 종교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논리가 명백한 데는 짐승과 달리 하늘을 향해 머리를 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천 년 전 유대 땅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유가 바로 한 시대가 부패했을 때, 부패한 그들에게 종교성(영성)을 회복시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를 향해 ‘랍비’라 불렀으니, 이는 스승이요 선생님이다. 나아가 ‘은혜로 보호하고 가르치는 스승’ 곧 “보혜사(保惠師)”라 칭했다.

인간에게 가장 근본 된 학문은 바로 인문학(人文學)이며, 이는 인간의 근본을 탐구하는 학문이며 나아가 자아(自我)를 발견하게 하는 학문이니 곧 종교다. 세상의 그 어떤 학문으로도 인간의 근본을 알 수는 없다. 세상의 철학과 학문으로 인간의 근본을 알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우리 또한 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주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니 그 분이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것이 진리다.

이천 년 전 예수님도 “나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니 곧 진리고, 너희는 너희의 생각과 유전을 말하니 거짓말”이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진리를 말 하는데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받아주지 않았고, 예수는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떠나셨고, 떠나실 때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했으니, 지금 세상교권은 물론 종교까지 무너진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당시 사도 중에 사도였던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니라(고전4;15)”고 했다. 여기서 바울이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고 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부터 알아야 한다. 이 복음은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며,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啓示)로 말미암은 것이다(갈1:11~12)”라고 했으니,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의 영을 받지 않고도 종교도 세상의 교권도 스승의 지위도 회복할 수 없다는 진리를 거역하지 말자.

이제 세상은 또 다시 종교 말세를 맞았고, 이천년 전 예수께서 친히 보혜사로 오셨고, 가시면서 다시 올 때 믿음가진 자 없는 밤 같은 세상에 스승의 빛으로 오시는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해 놨다면 믿겠는가.

그가 예수님의 것 즉, 계시를 가지고 이 세상을 회복할 것을 온 인류가 읽고 있는 경서를 통해 미리 약속해 놨고, 그 약속대로 많은 고난을 받으며 대구(大邱, 큰 언덕)라 하듯 온 인류가 기대고 의지할 큰 스승이 돼 보혜사의 사명을 다 하며 영원한 복음을 전할 때, 그 때처럼 핍박하고 저주하지 말고 가르침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허무한 상식과 굴레 속에서 습관처럼 지켜지는 스승의 날은 잠시 뒤로하고 참스승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빛으로 오신 스승을 깊이 생각할 수 있을 때, 세상은 틀림없이 새로워 질 것이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우리의 스승은 곧 어버이시다.

이제는 세상이 확연히 변해가고 있다. 변화되는 세상을 따라 가려면 모든 생각의 차원을 달리해야 하며 오는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

옛 것은 낡아지게 하는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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