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추억의 야구장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올 새 봄을 맞으면서였다. 싱그러운 젊음이 넘치는 대학캠퍼스에서 ‘스포츠 산업론’을 소재로 새로운 강의를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생생하고 개별적인 추억들이 녹아있는 경기장은 아름다운 로망으로 대부분 사람들의 가슴에 간직되어 있을 법하다.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추억의 야구장은 학생들에게 흥미로운 관심을 유발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경험한 정보를 학생들과 공유하기 위해 미국의 에벳필드 스타디움과 동대문야구장을 소개했다.

‘마이웨이’로 유명한 40~50년대 추억의 팝스타 프랭크 시나트라는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오랜 야구팀 브루클린 다저스와 그 팀의 에벳필드 스타디움에 대한 사무치는 개인적인 감상을 노래했다. 조 라포소가 쓴 ‘바로 이곳엔 야구장이 있었다네(There used to be a ballpark right here)’라는 제목의 이 노래를 통해 시나트라는 어린 시절 뉴욕 브루클린의 넓은 땅에서 관전하며 보냈던 뜨거운 여름날의 추억을 되새겼다.

십수 년 전 즐겨 들었다가 검색사이트 ‘구글’을 통해 다시 감상한 이 노래는 시나트라 자신의 감정과 대중들의 이야기가 노래 가사 속에 잘 녹아들어 있다. 한 여름에 핫도그와 맥주를 곁들여 먹으며 경기를 즐기고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날 밤하늘에 휘황찬란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것을 감상했으나 이제는 야구장도, 팀도 사라져 아쉽다는 내용이었다.

1958년 다저스의 구단주가 브루클린팀의 마지막을 알리면서 경제성이 좀더 나은 LA(박찬호가 한때 뛰었던 LA 다저스 바로 그 팀의 연고지)로 연고지를 옮기고 2년 뒤 세상에서 없어진 에벳필드 스타디움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돈이 감성을 이긴 사례로 평가됐다.

동대문야구장도 에벳필드과 같은 전철을 밟아 세상에서 사라졌다. 1962년 개장한 동대문야구장은 1980년대 초 프로야구 출범이전까지 올드 야구팬들의 열정과 추억이 짙게 녹아있는 장소였다. 시내에 일이 있어 이따금 동대문야구장 앞을 지나노라면 오래 전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1970년대 고교야구가 열리는 날이면 관중석이 만원사례를 이뤘으며 TV 뉴스를 중단하고 야구중계를 속개했을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다.

필자도 동대문야구장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갖고 있다. 중학교 시절 윤몽룡의 중앙고가 봉황대기 결승에서 배명고에 아깝게 분루를 삼키는 모습을 안타깝게 관전하기도 했으며 청소년 대표 유대성이 일본의 고교 괴물투수 에가와의 강속구를 장쾌한 솔로홈런으로 무너뜨린 장면은 지금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찌릿찌릿하다.

동대문야구장은 서울 고척동에 돔 형태의 새 야구장을 건립한다는 계획에 따라 철거됐고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와 시민공원이 함께 들어서 활용되고 있다. 올드 야구팬들의 많은 감성이 어우러진 동대문야구장이었지만 도시계획과 경제논리에 따라 역사속의 전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대목은 미국의 에벳필드 스티다움에 대한 그리움의 노래를 불렀던 시나트라의 명곡처럼 올드 야구팬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대중적인 노래가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누군가 한번쯤 한번 시도해볼 만한 일이라고 본다.

비록 자본의 논리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두 야구장의 예를 들었지만 복합 여가공간으로서의 경기장은 현대사회에서 많은 스트레스에 찌든 대중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필요하다. 스포츠팬들은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엮어내는 각본없는 드라마를 통해 특별한 사랑과 애착을 가지며 감성적인 스토리를 추억으로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에벳필드 스타디움과 동대문야구장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야구장의 전설은 미국과 한국의 야구팬들의 가슴에 행복한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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