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년)은 자유 언론의 신봉자이고 뛰어난 문장가지만 대중 연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세기의 명문장인 1776년 7월 4일에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을 쓴 사람이 제퍼슨이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써 놓았을 정도였다. 이렇게 썼다. ‘미국 독립 선언서와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입안자이며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인 토마스 제퍼슨 여기에 묻히다’ 그는 죽어서 자신이 세운 버지니아 대학 경내에 묻혔다. 그의 묘 앞에 그 같은 내용의 묘비명이 세워져 있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이 묘비명에는 후손들이 우러러 볼 최고의 관직인 영광스러운 대통령의 경력은 빠져 있다. 여기에는 제퍼슨의 의미심장한 사려(思慮)가 배어 있는 것 같다. 생전에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인간의 허상(虛像)이기 쉽다. 따라서 제퍼슨은 대통령직에 있었다는 것을 내세우기보다 자신이 진정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살았느냐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렇게 평가받기를 원한 것 같다. 이것은 일면 자신감이며 일면 겸손이다.

제퍼슨인들 인간적인 허물이 없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거창한 묘비명으로 덮으려 시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묘비명만 거창한 사자(死者)들이 얼마나 많은가. 거꾸로 묘비명이 없거나 간소하고 소박하지만 훌륭한 삶을 산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몰라 그렇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은 묘도 묘비명도 없다. 그렇게 된 이유에 무슨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숨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그의 명성은 지금도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운다.

사실 천하를 호령하고 파란만장한 영웅의 삶을 산 그의 행적 모두를 보통의 작은 묘비명에는 다 적어 넣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묘비명이 없어도 대 영웅의 명성은 언젠가 닳아 없어질 묘비명에 새긴 것보다 더 진면목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것 같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을 했다 한들 나라에 보탠 것이 없고 죽고 죽이는 권세 싸움이나 했거나 일신이나 일가의 부귀영달이나 탐한 사람들이 죽어 미문(美文)으로 꾸민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거창한 묘비명만 세워놓으면 뭐하나. 그것은 뻔뻔함의 극치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꾸밈없고 소박한 제퍼슨의 묘비명은 더욱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가.

제퍼슨은 생전에 딱 두 번 대중 연설을 했을 뿐이다. 1801년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의 첫 번째 취임연설과 1805년 연임에 성공함으로서 행한 두 번째 취임연설이 그것이다. 그는 선거 유세도 하지 않았다. 혀가 짧아 발음이 부정확한 탓에 대중 앞에 나서 연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첫 취임연설에서 제퍼슨은 들릴 듯 말듯 한 작은 목소리로 심각한 국론분열의 폐해를 지양하고 국민이 단합할 것을 각별히 호소하면서 시정 방침을 설명해 나갔다.

그는 ‘의견의 차이가 주의(主義)의 차이는 아니다(Every difference of opinion is not a difference of principle)’라고 했다. 이 말은 그동안 심각한 대립을 빚어온 강력한 중앙집권을 주장하는 연방파와 각 주로의 분권(分權)을 강조하는 자신이 속한 공화파간의 화해를 제안하는 말이다. 두 정파는 한때 연방파가 제퍼슨의 공화파를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 제거하려 했을 만큼 극심한 마찰을 빚었었다. 의회도 언론도 공무원도 패거리로 찢어져 서로 비난하고 헐뜯었다. 그래서 제퍼슨은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일구어낸 자신의 당선을 일종의 무혈 평화 혁명으로 생각했다. 제퍼슨은 연설에서 다수결의 원리와 분권, 종교의 자유,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에 의한 신체의 자유, 군권(軍權)에 대한 민간 우위(The supremacy of the civil over the military authority)와 언론 출판의 자유(Freedpm of the press) 등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들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 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언론 자유의 강력한 옹호자였지만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 이 같은 신념은 짙은 회의로 변해있었다. 그는 첫 임기의 국정 수행 과장에서 언론의 무자비한 비판과 질타에 무척이나 시달리고 마음이 상했었다. 공적인 직무 수행과 사생활 모두를 난타 당했다. 오죽하면 제퍼슨이 긍정적인 청사진으로 채워져야 할 취임연설에서 “국정 수행을 방해하기 위한 언론의 포화가 우리를 겨냥해 퍼부어졌다. 그것은 언론의 부도덕함(Licentiousness)이 고안해내고 감행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동원해 장전된 포화였다”고 했을까.

그는 “자유와 학문을 위해 그처럼 소중한 제도(Institution)의 하나인 자유언론의 이 같은 악폐는 그것의 유용성을 감소시키고 안전을 약화시킬 수 있기에 이를 깊이 개탄하게 되는 것(Deeply to be regretted)”이라고 했다. 그는 “허위와 중상의 출판물을 여러 주들의 법에 따른 강제력으로 처벌하고 교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공무원들이 긴급한 공무 때문에 시간에 쫓겨 그러질 못 하고 국민의 분노 속에서 그들의 징벌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내맡겨져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계속했다. “더 없이 귀중한 언론의 자유와 타락으로 가는 부도덕함을 분간하는 명확한 선을 그을 방법은 달이 없다. 당사자들의 소견을 충분히 들은 후에 바로 잡는 조치를 취하겠다. 그러고도 그릇되고 부당한 사례들이 계속되면 여론의 검열(The censorship of the public opinion) 안에서 대안이 찾아져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언론의 공격에 시달린 제퍼슨에게 대통령의 추억은 즐거운 추억일 수 없었을 것 같다. 혹여 그 때문에 묘비명에 대통령의 경력을 빼버린 것은 아닌가. 반대 정파 언론들의 편파성과 일방적인 공격이 그를 지긋 지긋하게 괴롭혔다. 자유언론은 이런 불공정 편파보도의 원죄(原罪)를 안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이 원죄에서 지금의 원론은 자유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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