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관순 열사 기념관에 있는 추모각의 모습. 향을 피우고 추모를 하기 위해 찾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유관순 열사 기념관 및 생가 탐방기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살아서 독립기(獨立旗)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좇아 수괴(羞愧)함이 없이 즐겁게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의무가 아닌가. 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衷曲)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노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3.1운동 시기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중 발췌-

3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알리는 달이자 과거 일제의 수난 속에서 우리 민족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던 달이다. 3.1운동이 있어진 지도 어느덧 92주년째 접어든다.

한 여인의 열정이 독립운동에 고스란히 녹아났던 그 역사를 되짚어보며 지난 2월 18일 그의 고향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를 찾아갔다. 이곳은 유관순 열사의 고향이자 열사가 주도했던 아우내장터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구제역 여파로 아우내 장터는 장이 서지 않아 황량한 거리에 1층짜리 건물들만 줄을 지어있었다.

유관순 열사, 지금도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어

유관순 열사의 숨결을 느껴 보고자 찾은 곳은 병천면소재지에서 약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사적 230호 유관순열사 기념관이다. 이곳에서 열사의 모습을 초상화를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산 중턱에 떡하니 자리 잡은 기념관은 유관순 열사에 대한 기록물 전시관과 초상이 걸린 추모각으로 구성됐다.

기록물 전시관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행적에 대한 전시 패널과 간단하게 체험을 할 수 있는 벽관이 있다. 벽관은 그야말로 몸이 움직일 수도 없는 벽에 설치된 관이다. 너무 좁고 칙칙하고 어두워 도저히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잠시나마 갖은 고문을 당하고 괴로운 몸을 갖고 이 벽관에 갇혔을 독립투사의 모습을 생각하니 아찔하다.

추모각에는 향로와 향,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다. 추모각 내 영정이 있는 곳에서 밖을 보니 태극기 사이로 저 멀리 병천면과 아우내장터가 내려다보인다. 흡사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아우내 장터 쪽을 항상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산 중턱이라 들과 논, 마을도 시원하게 보인다.

 

▲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라 어린시절을 보낸 생가. ⓒ천지일보(뉴스천지)

시대 흐름을 읽고 그 물결에 몸을 실어

 

“나라 없는 백성이 어찌 백성이겠는가. 나라를 찾읍시다”

유관순 열사. 이름만 알지 말고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보자. 열사에 영향을 크게 미친 아버지 유중권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해 개화사상을 갖고 민족 계몽운동을 했다.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한 계몽 운동가였던 부친 아래서 열사도 기독교적 사관과 민족의식을 함께 길렀다.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시기는 국제적 정세에서도 독립 운동을 펼치기 좋은 호기였다. 미국에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도 단결해 이 민족자결주의의 효과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독립운동은 한반도 거국적으로 계획됐다. 주로 종교계와 학생들을 위주로 진행이 이뤄졌다. 천도교를 시작으로 종교가 화합해 민족 독립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이후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들을 통해 2․8독립선언을 계기로 3.1운동이 발발하게 됐다. 3.1운동이 있으리라는 소식을 듣고 열사도 당일 탑골공원에서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임시 휴교령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이용해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충남 천안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시위운동을 하기로 계획하고 시행을 하기에 이른다. 정오가 되자 유관순 열사는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중략…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고 외쳤다.

이 자리에서 시위 중 부모가 모두 헌병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유관순 열사도 붙잡혔다. 징역 3년 형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만세운동을 벌이다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해마다 독립위해 몸 바친 정신 기려져… 추모객 끊이지 않아

매년 3.1절에는 유관순 열사와 독립투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추모각을 찾아와 묵념을 하고 향을 올린다. 유관순 열사 추모각 옆에는 독립투사들을 위한 추모각도 있어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는 독립운동을 한 영웅이 비단 유관순 열사뿐이 아님을 시사한다.

유관순 열사의 자료가 많지 않아 오해를 한 부분도 있었던 듯하다. 추모각 아래에는 초혼묘 봉안 기념비문의 내용을 수정한다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었다. 기념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순국당시의 모습을 ‘열일곱 살 처녀 유관순은 사지가 육시로 찢기고 유택마저 파헤쳐져 흔적 없이 망실 당하였으니’라는 문구가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시로 찢긴 것’은 과장이며 사실이 아니라고 공지하고 있다.

추모각을 돌아 1.3km길을 타고 내려가면 이번엔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다. 1902년 12월 16일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곳이다.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 옆에 있는 생가는 초가집인데 초가지붕 관리를 계속해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생가 옆에 유관순 열사 동생인 유인석 씨 가족이 생가를 관리하면서 거주했던 기와집이 더 오랜 세월을 담고 있는 듯하다. 유관순 열사 생가 옆의 비문에도 잘못 알려진 내용을 정정하는 긴 문구의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과장된 표현을 전부 정정해 놓았다.

모든 것이 밝히 알려지고 드러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어쩌면 이 같은 조치는 당연한 것이다. 과장된 표현을 뺀다고 해도 유관순 열사의 나라를 향한 정신은 고귀하다는 사실에는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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