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카리타스 인터내셔널 대북지원 본부장 함제도 신부.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 ‘함께’가 가장 아름다운 말”
50번 북한 오가며 결핵환자 도와

[천지일보=이지수 기자] “한국에서 51년째 살고 있어요.” 먼 나라에서 온 푸른 눈을 가진 함제도 신부(79)는 인생의 반 이상을 낯선 땅 한국에서 보냈다.

“1960년에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기쁘게 살았어요. 하지만 지금도 매일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얼굴은 서양사람, 말도 부족하지만 제 마음은 한국인을 닮게 해달라고….”

50여 년의 세월을 한국에서 보냈지만 아직도 매일 한국인을 닮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함제도(제라르도 하몬드) 신부. 그를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의 작은 응접실에서 만났다.

“저는 한국이 발전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봤어요. 참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제가 한국 왔을 때 피난민들도 많고 보릿고개 같은 그 시대 어려운 점이 참 많았죠. 현재 북한 모습이 그때 모습과 비슷해요.”  한국 카리타스 인터내셔널 대북지원 본부장을 맡고 있는 함 신부는 북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카리타스의 목적은 아무 조건 없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에요. 북쪽에 어려운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이 말을 하는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 북한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함 신부는 지금까지 50번 정도 북한에 다녀왔다.

▲ 함제도 신부는 북한을 오가며 결핵환자를 돌보고 있다. (메리놀외방전교회한국지부 제공)

“처음 제가 북한을 방문할 때는 북한 사람들이 저를 ‘동지’라고 불렀어요. 그 다음 몇 년 뒤에는 ‘신부선생’ 조 금 후에는 ‘함 신부’ 그리고 ‘함 신부님’ 지금은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그러면 저는 ‘손자’라며 부르죠. 북한을 방문하는 동안 이 같은 모습으로 변해왔어요.”

함 신부는 평양북도와 남도, 신의주부터 남포까지 전국 40여 개의 인민병원을 방문한 후 결핵환자를 돌보고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지원한다고 한다.

“X-레이 기계, 수술실 등 여러 가지를 협조해주죠. 환자가 병이 나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요. 아픈 사람 중에 어린아이들도 있어요. 북한에는 의약품과 의료시설이 부족해요.”

지원하는 모든 의약품과 의료기계는 한국에서 구입한다. 기계 같은 경우 수리가 가능해야 하며 의약품은 같은 신체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 세심함이 느껴진다.  또 그는 무조건 도움만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북한 마을사람들과 병원 측이 함께 협조하며 많은 일들을 해내가고 있어요. 한국의 여러 가지 말 중에 ‘우리’ ‘함께’가 제일 아름다운 말이에요. 함께하는 일은 이뤄질 수 있는 일이에요. 북한에서 선전하는 말 중에도 ‘일심단결’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주 아름답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조금은 남아 있던 미국인이라는 선입견이 단숨에 날아갔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북한과 한국을 한 인간으로 생각하면 반으로 잘라진 겁니다. 지금까지도 왜 갈라져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눈,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 되는 일 없어요. 특히 이산가족을 생각하면 얼마나 슬픈 일인지… 게다가 한국은 역사적으로 일본시대부터 슬픈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습니까.”  은퇴 후에는 북한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함 신부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국 친구로부터 시작됐다.  6.25때 함 신부는 고등학생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한국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1956년 부통령을 지낸 장면박사의 아들 장익주교였다. 두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와 같은 신학대를 거쳐 지금까지 오랜 우정을 나누고 있다.

그는 27세 때 신부가 되자마자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후 그는 30년간 충북지역에서 일했다.  청주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괴산과 보은, 옥천 등 본당에서 일하다가 1990년에 서울로 왔다.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아직도 한국인을 닮기 위한 그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외모는 푸른 눈에 피부색깔도 다르지만 정신만큼은 닮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한국 사람은 ‘인내심’ ‘이해심’이 아주 강해요. 특히 서양 사람 입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한국인의 한(恨)입니다.”

▲ 북한아이들과 함께한 함 신부. (메리놀외방전교회한국지부 제공)
그는 이 ‘한’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 <서편제>를 네 번 정도 봤다고 한다. 함 신부는 우리나라 문화와 풍습이 잊혀 가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처음 한국 왔을 때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어요.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학생들이 모자를 일제히 벗는 모습, 담배를 피울 때 웃어른 앞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술을 마실 때도 마찬가지고요. 이것은 인간을 존중하는 일이에요. 또 흰옷을 많이 입었잖아요.”

함 신부는 지난해 5월 그의 사제서품 50주년 행사가 있던 날 주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교님, 저에게 묘지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뒤이어 설명했다. “저의 희망은 끝까지 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미국이 아닌 한국이 나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가슴아파하고 50여 년간 한국의 역사 속에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한 함제도 신부는 그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이었다.

한국 카리타스 인터내셔널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산하인 한국 카리타스 인터내셔널은 1975년 ‘인성회(仁成會)’라는 이름으로 농민과 빈민을 위한 개발협력 사업을 전개했다. 이어 1991년 ‘사회복지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뒤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 카리타스’라는 이름을 대외적으로 사용해왔다.

한국 카리타스는 1993년부터 해외 원조사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약 239억 원을 세계 165개 회원기구가 가입해 있는 국제 카리타스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에 지원해왔다.

한국 카리타스는 2007년부터 국제 카리타스의 대북지원사업 실무추진기구로 위임받아 결핵환자 지원이나 B형 간염 백신 공급, 식량공급 등 인도주의적 대북 지원사업도 벌여왔다.

또한 기존의 국내 복지 지원 활동과 해외 구호 활동을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14일 외교통상부로부터 재단법인 ‘한국 카리타스 인터내셔널’의 설립을 허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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