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바친 미국으로부터 `간첩'으로 몰리다니.."
"한국인이란 사실 잊은 적 없어..한국 국가전략 잘 세워야"

(워싱턴=연합뉴스) 2009년 6월11일 미국의 폭스뉴스는 '북한이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이후 추가 핵실험 등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의 2차 핵실험(5.25)을 규탄하는 대북제재 결의안 채택을 위한 유엔안보리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북한은 5월29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유엔 제재가 시행될 경우 "더 이상의 자위적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천명, 3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시험이 카드로 거론되고 있던 때라서 그리 새삼스러운 뉴스도 아니었다.

그러나 1년여가 지난 2010년 8월27일 미국 연방검찰은 이 폭스뉴스 기사가 극비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며 국무부 검증.준수.이행국 정보총괄 선임보좌관인 한국계 스티븐 김(44.한국명 김진우)을 유출자로 지목, 간첩법 위반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미 워싱턴 연방법원에서 지난해 10월과 12월 두 차례 공판이 열렸지만 검찰은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재판은 진척이 없는 상태이다.

이 사건은 오바마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운 보수매체 폭스뉴스로 정보가 흘러나가 '괘씸죄'가 적용된 케이스라는 해석도 있고, 미 NBC 방송은 연방정부가 국가기밀 누설문제에 편의에 따라 `이중잣대'를 적용한 과잉대응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변호인단은 이달초 검찰 기소내용이 표현의 자유 등을 규정한 헌법1조, 적법절차를 보장한 헌법5조를 어긴 위헌이라며 재판부에 소송 기각을 신청해 위헌논쟁으로까지 비화됐다.

스티븐 김은 27일 연합뉴스와 만나 기소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은 변호인을 통해서 입장을 밝혔고 언론과의 공식 접촉을 피해왔다.

그는 재판이 진행중이며 자칫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기소 내용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얘기하기가 곤란하다"는 전제로 인터뷰에 응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재판 전망은 어떤가.

▲답답하다. 기소후 6개월이 지났지만 진전이 없다. 신속히 재판이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경제적 부담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 지쳐간다. 하루빨리 사필귀정으로 끝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검찰이 기소한 혐의에 대해 항변할게 있을 것 같은데.

▲재판이 진행중이라 자세히 얘기하기 곤란하다. 하고픈 얘기는 많지만 변호인이 내가 직접 나서 얘기하는 것을 꺼린다.

--변호인단이 수사과정에서 인종차별적 조사를 받았다고 공청회를 요구했는데.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수사과정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태산같지만 그것도 추후 법정에서 공개할 사안인 것 같다.
--수사과정이나 재판과정을 통해서 느끼는 심경은.

▲나로선 상상하지 못한 일에 휘말렸다. 미국서 공부하고 연방정부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모든 것을 바쳤는데, 내가 `간첩'으로 몰리고 있다니...세상이 뒤집어졌다는 생각뿐이다.

--현재 신분은 어떤 상태인가.

▲기소후 보석금 10만불을 내고 가석방돼 있는 상태로 집에서 25마일 이상 벗어나지 못하는 거주지 제한을 받고 있다. 무슨 중죄를 저질렀다고 자유를 제한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국무부는 나가지 않고 원 소속인 리버모어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상태다.

--조지타운대, 하버드대, 예일대에서 학위를 받았는데 왜 학자의 길을 가지 않았나.

▲교수를 꿈꿨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뉴욕주립대에서 종신교수직 제안을 받았지만 강단에 안주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전공하면서 역사를 바꾸는데 역할을 하고 싶었다.
--박사학위 논문이 `이승만과 한미동맹'이다. 이를 주제로 택한 이유가 있었나.

▲유럽외교사쪽으로 논문을 생각했는데 지도교수들이 내가 한국인이고 한국말을 잘 하기 때문에 나만이 할 수 있는 주제로 학문 적 업적을 남기라고 조언했다. 한국서도 이승만 연구가 제대로 된 게 없었다. 당시 영어와 한국어로 된 1차자료를 모두 분석해서 쓴 첫 논문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국내정치에는 실패했지만 미국과의 외교에는 뛰어난 대통령이었다. 미국을 압박하며 실익을 챙겼던 전략적 외교가였다고 생각한다. 공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오늘날의 한미동맹과 안보의 토대를 쌓은 점은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역사학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핵전문가가 어떻게 되었는가.

▲원래 역사학중에서도 군사외교, 핵억지 분야를 전공했다. 정치.외교만 알고 핵.미사일 테크놀로지는 모르는 것은 불완전한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총체적 분석을 위해선 양쪽을 다 알아야 한다. 핵문제에 최고권위를 인정받는 리버모어 연구소에서 과학자들과 일하며 핵기술 분야를 함께 연구했다.

--북한핵 전문가로 변신하게 된 과정은.

▲각국의 핵 디자인은 다를 수 있지만 동일한 핵물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서로 연계가 돼 있다. 또 나쁜 놈들은 같이 놀기 마련이라 서로 연결돼 있다. 이 때문에 핵전문가는 북한핵, 파키스탄핵, 이란핵 전문가가 따로따로 있을 수 없다. 파키스탄 핵을 다루면 북한핵도 알아야 하고, 북한핵을 다루면 다른 나라 핵까지 함께 알아야 한다. 리버모어 연구소에 일할 때부터 북한핵문제는 계속 이슈였기 때문에 추적해왔다.

그 이후 탈북자들을 만나고 북한내 여러 정보를 접하면서 북한의 현황과 미래에 대한 분석과 판단을 발전시켰다.

--북한핵은 우라늄농축 단계까지로 진전됐는데, 북한 핵 프로그램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구체적 정보사항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달라.

--부시 행정부 시절 6자회담이나 북핵문제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나.

▲국무부 검증.준수.이행국에서 일했기 때문에 협상을 중시하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와는 대립하던 입장이었다. 2008년말 북한 시료채취 문제가 논란이 됐을 때 힐과는 반대 의견을 올렸고, 북한에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편에 섰다. 최상의 결정을 위해서 반대의견도 분명히 피력하는게 내 일로 생각했다. 당시 힐팀은 핵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이해하려는 시도도 안하는 편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관계 현안때문에 한국도 몇차례 들렀다.

--한미동맹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과거보다 동맹 수준이 높아졌다. 다만 동맹이라도 기본적으로 양국의 국익은 다르다. 미국에 의존하기보다는 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어젠다를 제기하고 요구할 것이 있으면 요구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한국이 놀라울 만큼 경제발전을 이뤘지만, 국가전략도 함께 발전됐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시기에 따라 반미로, 친미로 왔다갔다 하는게 아니라 국가전략을 잘 세우고 거기에 따라 움직여야한다.
--어릴 적 이민을 왔는데 한국말도 유창하다.

▲부모님이 영어도 완벽해야 하지만 한국어도 잊지 않도록 교육시켰다. 자라며 인종차별도 겪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노력했다. 이민왔지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잊은 적도 없다. 한국서 태어났으니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품고 있다. 지금은 부모님이 한국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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