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권력은 사람과 조직과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권력의 본질은 강제력이며 군림이다. 이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이 사회적 강자(强者)로서 사회적 서열의 우위를 차지한다. 사람의 천성엔 사회적인 강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댄다. 그 욕망은 등불이 불나방을 꾀듯 사람을 죽자 사자 권력의 주위로 모여들게 하는 강한 유인력이 된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의 본령은 국민에 대한 봉사다. 하지만 그 같은 권력의 표면적인 미명(美名)이 사람들로 하여금 권력 주위에 모여들게 하고 권력을 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유인력은 차라리 아주 사소한 것이 아닐까. 권력 주위에 불나방처럼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권력의 본질인 물리력, 그것에 대한 매력 때문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위선의 덫에 걸려들지는 않을 것 같다.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권력을 사유화하고 싶은 욕심이 이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나 할까. 그것이 사람 욕심이다. 이 욕심에 사람의 맑은 이성(理性)은 무너진다. 극단적일 경우에는 ‘짐(朕)이 곧 국가다(L΄Etat C΄est Moi 레따 쎄 므와)’라고 말한 과거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같이 된다. 권력이 절정일 때가 권력자에게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누가 감히 나에게 덤빌 수 있나’하는 순간의 오만과 방심이 그를 나락에 떨어지게 한다. 결국 루이 14세의 권력 농단과 궁정 생활의 타락은 프랑스 시민혁명의 불씨가 돼주었다. 권력은 복종을 강요하지만 타락한 권력은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지 못한다. 대중의 반감을 키워 배를 뒤집는 거친 바다와 같이 민심을 사납게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교훈에도 사람들의 권력에 대한 탐욕은 항상 그대로이다.

권력싸움은 게임이다. 권력 게임은 비단 제왕의 반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사회의 모든 공(公)과 사(私)의 단위에서 주도권 쟁탈과 영향력 확대, 의사 결정권을 다투는 권력 게임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권력 게임에 휘말려 일상을 사는 셈이다.

‘권력의 법칙(THE 48 LAWS OF POWER)’이라는 책 (안진환 이수경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刊)을 통해 저자인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흉계가 난무하는 거대한 궁정과 같고 우리가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면 권력 게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썼다. 이 책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그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권력 게임에서의 승자가 되는 전략과 전술 전기다. 인생의 보편적인 길잡이로 도덕과 각종 규범, 사람의 양심과 이성, 선악과 미추(美醜)의 분별심, 정의감 등이 교습(敎習)돼왔다. 그것과 비교해 저자의 관점은 삐딱하면서 독특하고 파격적이며 소름 돋게 한다. 저자의 관점에 일방통행을 허용할 수는 없더라도 나름대로의 냉엄하고 날카로운 인생과 사회에 대한 관찰과 분석만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실 인생은 모두가 승자가 되기 위해 만인과 만인이 극심하게 다투고 경쟁을 펼치는 레드 오션(Red Ocean)이 아닌가. 살다보면 세상이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기만과 술책과 허위와 위선에 분노할 때가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권력이 무소불위인 시대는 지나갔다. 특히나 개인이 부귀와 공명을 위해 권력을 탐하고 권력을 누리고 사유화하려 한다면 틀림없이 패가망신의 참담한 대가가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조조와 제갈공명이 싸운 적벽대전이나 신라와 백제가 자웅을 겨룬 황산벌 전투처럼 단판 진검 승부로 양단간에 죽고 살고가 영원히 결판나버리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게임 규칙이 있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생활 질서에서 승자 독식은 불가능하며 권력 행사에는 한계가 있다. 규칙에 의해 권력의 전횡은 억제되며 게임에 한번 진 패자라도 부활 전(復活 戰)에 의해 얼마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지구상에는 인민에게 복종의 규칙을 강요하며 자신은 규칙 위에 군림하고 권력을 전횡하는 예외적인 절대 권력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에 대한 반항은 곧 죽음이다. 무자비함과 공포가 그들의 통치 수단이지만 역사의 대세를 거스르는 이 어둠의 공포 권력이 가면 얼마나 더 갈 것인가. 민주주의가 좋은 것은 승자와 패자가 공존하는 상생의 룰(Rule)이 작동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승리가 지니는 빛나는 가치만큼이나 유의미(有意味)한 아름다운 패배도 있다. 자칫 승자가 불행하고 패자가 도리어 행복할 수도 있다. 선택의 문제이므로 훈계할 일은 못 되지만 굳이 권력 게임에만 목숨 걸고 살벌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지 않은가. 인생 전반을 권력 게임의 시각으로만 바라볼 일도 아니다.

해가 기울 듯 지는 권력은 떠오를 때는 몰랐던 그 영화(榮華)의 허무함을 안다. 하늘을 나는 항룡의 후회와 같은 회한이 서린다. 권력을 탐하려는 사람, 권력의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 또 권력의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이 이런 이치를 알고 실천한다면 그는 권력을 가져도 될 만한 현인(賢人)일 것이다. 게임의 규칙, 권력행사의 룰을 지키는 것은 최소한의 형식적인 실천 항목이다. 더 중요한 것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 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 술이 잔의 적정선을 넘지 않게 스스로 조절해주는 계영배(戒盈杯)의 이치와 같은 삼가고 겸손할 줄 아는 도덕률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인격이다.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갖는 지도자가 돼야 국민과 나라가 편안하다. 국민이 이런 사람을 골라 권력을 위탁해야 한다. 권력 게임에만 능하거나 권력에 대한 탐욕이 눈에 보이는 위험한 사람은 주기적으로 있는 선거에서 끌어 내리자. 이것이 선량한 국민이 해야 하는 소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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