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경근당(敬近堂)은 종친부(宗親府)의 정당(正堂)이라 할 수 있는 곳인데, 30칸으로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직접 편액(扁額)하였으며, 대군(大君)과 군(君)의 사무를 처리하던 대청(大廳)으로 사용되었는데 종친부의 핵심 건축물(核心建築物)이었던 천한전(天漢殿)이 없어진 이후 중심 건축물로 격상(格上)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옥첩당(玉牒堂)은 경근당의 좌측에 위치하였으며, 15칸으로 종정경(宗正卿)의 대청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당(貳丞堂)은 경근당의 우측에 위치하였으며, 15칸으로 하급(下級) 낭인(浪人)들이 근무하던 곳이었다

사성문(四星門)은 내삼문(內三門)으로 정문 3칸 남북으로 행각(行閣) 63칸(10.5칸 장판각 포함)으로 이루어졌으며, 외삼문(外三門)은 정문으로 3칸이며, 남북으로 행각이 15칸이고 뒤에 아문 1칸이 있었다.

이러한 건축물들 이외에 종친부에는 서리청(書吏廳)을 비롯하여 신당(神堂), 사령방 등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전부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소개한 종친부 내에 있었던 건축물들중에서 현재 경근당과 옥첩당이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한편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종친부는 종정부 체제를 거쳐 1896년(고종 33)에 발생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후 종정원(宗正院) 체제로 개편되는 변화를 맞이 하였다.

1905년(광무 9) 11월 22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외교권(外交權)이 박탈되면서 사실상 국권을 잃은 상황이 되었으나,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에 서명한 적이 없으며, 일제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중심으로 고종황제를 위협하면서 강제로 체결하였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 이후 극비리에 밀서(密書)를 통하여 외국의 황제들에게 을사늑약을 무효로 하여 줄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내 1907년(융희 1)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하여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등 세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호소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와 참가국들의 소극적인 실패로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세 특사중의 한명인 이준은 현지에서 장렬히 순국(殉國)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양위(讓位)하였으며, 순종황제(純宗皇帝)가 즉위(卽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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