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영 서울불교산악회 회장(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 ⓒ천지일보(뉴스천지)

서울불교산악회 고원영 회장 인터뷰

[천지일보=이길상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공익기부재단 아름다운동행은 매월 셋째 주 금요일 저녁 서울 보신각 앞마당에서 ‘비움으로 행복찾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인 보신각 앞마당에 어둠이 깔리자 캠페인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 행사에는 서울불교산악회도 참여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단체는 아니지만 불자와 산악회, 왠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이 행사에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목에 두른 채 완전무장을 한 서울불교산악회 고원영 회장이 나타났다.

고 회장은 욕심이나 집착을 끊어 청정해진 마음을 비움이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이라면 자연스레 나보다 남을 배려하고,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다며 캠페인에 참가해 솔선수범을 하고 있다.

비움과 나눔은 가지만 다를 뿐 한뿌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고 회장을 만나 불자가 된 인연과 그의 철학, 산악회 이야기를 들어봤다.

◆ 불교와 인연이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헤르만 헷세의 <싣달타>를 읽고 감명 받았다. 그 때문인지 직업을 선택해야 할 시기인 이십 대 때는 출가해 스님이 될까란 생각을 종종 했었다.

서른 살 즈음에 연등을 따라 밤길을 걷는 꿈을 꾸었는데 이상하게도 며칠 동안 같은 꿈을 꾸었다. 그 후 화계사를 찾았는데 이유는 그 무렵 읽던 김용옥의 책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 화계사 조실인 숭산스님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도올(김용옥)이 오랫동안 우리 불교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철스님을 비판하면서도 숭산스님을 찬탄하는 까닭이 궁금했다.

◆ 부처님의 말씀 중 특별히 가슴에 와닿는 말씀은?
금강경의 한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가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이란 문장이 좋지만, 나는 부처님의 말씀보다 그분의 전 생애를 믿는다.

왕자의 신분인 그가 성 밖에서 여러 괴로움의 모습을 목격한 일, 출가해서 갖은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서 깨달고, 깨달음을 전파하려 ‘네란자(Neranjara)’라 강가에서 함께 수행했으나 자신을 떠났던 다섯 사문을 찾아 먼 길을 떠났던 일, 먼 길이란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전법을 의미한다.

일체계고(一切階苦, 모든 것이 다 괴로움)라 말씀하셨듯 부처님은 사실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의 작은 왕국 까삘라밧투(Neranjara)가 왕도 백성도 없이 멸망했으니 말이다.

까삘라밧투를 지배하려 이웃나라 코살라의 군사가 쳐들어왔을 때 부처님은 메마른 나무 아래서 뙤약볕을 견디고 있었다. 코살라 왕이 물었다. “우거진 나무도 많은데 하필이면 잎이 하나도 없는 나무 아래 앉아 있소?” 부처님은 대답했다. “친족이 없으니 그늘 없는 나무와 같소.” 그처럼 불행한 삶이었던 부처님이 그 후 정신세계의 왕으로 추앙받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의 삶을 안다면 그가 설파했다는 모든 말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 신앙적으로 영향을 받은 분은 누구, 존경하는 인물은?
삼선포교원에서 만난 반영규 거사님이다. 이분은 불교에 관련한 책을 여러 권 냈고,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불교 오페라를 제작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금 불자들과 함께 산행을 하거나 사찰을 순례하는 일은 모두 그분에게서 배운 것이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

스님으로는 강남포교원 성열스님과 실상사 도법스님을 꼽을 수 있다. 두 분의 전법(傳法)이 검박(儉朴)하면서도 명료해서다. 부처님 말씀을 모호하게 포장하기보다 쉽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류가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은 역사 속의 인물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역사의 바깥, 그러니까 신화나 소문에 근거한 허구적 인물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공감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불교산악회가 2009년 2월 도봉산 등반을 마치고 망월사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사진제공:서울불교산악회) ⓒ천지일보(뉴스천지)

◆ 불자로서 마음이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면?
우리 불교가 너무 관념적이다. 이것은 중국 선불교의 영향 때문이거니와 불교가 소수의 수행자에 편향돼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의 대중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금보다 훨씬 낮은 곳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경전을 주도하는 한문을 하루바삐 읽기 쉬운 한글로 재편해야 한다.

요즘 젊은 세대는 한문을 모른다는데, 경전이 한문으로 되어 있다면 누가 읽겠는가. 불교의 미래가 점점 불안하고 불투명해지는 현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불자로서의 기본 의무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불자라면 계(戒)를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불교 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기본교육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교육도 받은 적 없으면서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느니, 그래서 혼자 공부하겠다느니 밑도 끝도 없이 알음알이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계를 받은 후에도 절에 다니면서 꾸준히 수행해야만 한다. 절에 머무는 건 받은 계를 잘 이행하는지 점검하는 시간이다. 계를 받는 것보다 사실은 더 중요하다.

◆ 서울불교산악회에 대해 설명한다면?
절에 가서 법문을 듣는 것만이 재가불자된 도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참선․삼천배로 대표되는, 절에서 불자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프로그램 외에도 불교를 받아들이거나 전하는 길은 많다고 보았던 것이다. 불자들끼리의 교류도 타 종교에 비해 활발하지 않은 것도 서울불교산악회를 만든 이유다.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 절의 환경에서 쉽사리 생겨나거나 운영할 수 없는 조직을 만들어 감히 전법이란 걸 실행했으며, 그 때문에 사서 고생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불교를 가까이할 수 있는 방편으로써의 조직이 공조직이든 사조직이든 절에서 더 많이, 다양하게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면 불교계에서 서울불교산악회 같은 외곽조직에 관심을 기울이든지.

서울불교산악회가 회원들을 인도하는 곳은 결국 절이다. 2008년 설립한 서울불교산악회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초발심자(初發心自 처음 불문에 들어선 사람)를 꾸준히 조계사 교육관으로 인도하고 있다.

올해로 3년째 접어드는데 매년․매월․매주 산행과 사찰순례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있다. 절에 가서 법회를 열어 스님 법문을 들은 것도 여러 차례이다. 송광사 화엄사 부석사 청량사 같은 큰 사찰을 찾아갔으며, 지리산 상선암 태백산 도솔암 같은 오지의 암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절을 찾아 원지(遠地)로 떠나는 것을 서울불교산악회에서는 ‘구법여행(求法旅行)’이라 부른다.

기금은 전적으로 법우들이 산행 때마다 내는 일정액으로 형성하는데, 이를 보시금이라 부른다. 그렇게 해서 축적된 기금을 작으나마 소외된 이웃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있다.

서울․경기도․인천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터넷(http://cafe.daum.net/circledoor)을 통해 가입할 수 있다.

◆ 조계종 종단에 하고 싶은 말은?
서울불교산악회 같은 자생단체에 관심을 기울여 불교의 저변확대에 진정으로 힘써 주었으면 한다. 군부대나 교소도 같은 데서 포교하는 것도 좋지만 매너리즘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부처님을 천수천안으로 상징하는 것은 전법의 길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수도 있다.

▲ 2009년 여름에 불암산에 오른 고원영 회장(사진제공:서울불교산악회). ⓒ천지일보(뉴스천지)

◆ 재가불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오계(五戒, 불교에 입문한 재가신도가 지켜야 할 5가지 계율)를 받은 불자라면 그것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만큼은 저버리지 말아야겠다.

어떤 불자는 중국불교의 무애자재(無礙自在, 걸림이 없고 자유로운 것)한 불교관을 흉내 내려는지 처음부터 아예 지키려고도 하지 않는다. 법을 어기면 질서가 무너지고, 지나치게 자유를 구가하면 방종이 되기 마련이다.

불자들을 모래알로 비유하고, 불자들의 모임이 모래성 무너지듯 잘 단합되지 않는다고 자조(自嘲)하는 것도 불자로서 지켜야 할 기본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중도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팔정도(八正道,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늘 필요하다고 본다.

◆ 종교간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불교와 기독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띠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는 것 같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역사에 근거한 성인이시다. 신통력의 우위를 따지면서 서로를 비난한다면 드높은 경지에 이른 불교와 기독교를 하등종교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불교와 기독교, 그 밖에 고등종교로서 면모를 갖춘 종교라면 크게는 인류의 평화, 작게는 개인의 행복을 도모하는 데 이견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환경문제는 전쟁보다 심각하게 인류와 개인을 위협하고 있지 않는가.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님 같이 현대문명이 고민해야 할 문제에 적극적으로 합심하는 것이야말로 상생의 길 아닐까.

◆ 종교지도자의 덕목은 무엇일까요?
종교지도자가, 특히 불교지도자가 청정한 정신만으로 존경받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을까.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읽어 그에 어울리는 실천방법, 요컨대 아이템을 잘 개발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불자들이 불교를 통해서 얻으려는 것은 여러 가지다. 어떤 이는 이 속도와 경쟁의 시대에서 낙후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불교에 귀의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에게는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지, 어려운 법문만을 강조해선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뿐더러 아무런 감동을 줄 수도 없겠다.

몇 년 전 길상사에 갔더니 은둔의 상징으로만 알았던 법정스님이 인터넷 문명을 언급하면서 정보과잉을 우려하는 법문을 펼치시고 있었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중요하다고 본다.

◆ 종교인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사항은?
종교인은 금욕생활을 통하여 자신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참을 수 없는 유혹이 있지만, 어떻게든 참아야 하는 것이 참된 종교인 아닐까. 술, 담배, 간음, 권력의 남용,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부의 축재…. 이런 것은 종교인이 아니라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종교인이라면 하지 않아야 할 남다른 각오가 있어야 하겠다.

◆ 종교에서 이단과 사이비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아놀드 토인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고등종교란 끊임없는 개혁의 결과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종교가 다수에게 보편타당한 행복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제행무상은 변화를 사물의 본질로 파악하고, 변화의 추구를 촉구하기에 매우 타당한 진리이다. 변화는 개혁의 다른 이름이다. 최근 독서계에 회자되는 마이크 샌달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다수의 검증을 거친, 마땅히 변화를 수용하는 정의를 참된 정의라고 주장한다.

일종의 변증법적인 정의를 말함이겠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다수의 검증대신 소수가 정의롭다고 우기는 종교는 일단 의심해 봐야한다. 검증이란 시간과 역사를 요구하는 데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라면 그런 게 결여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단의 경우 교묘하게 위장되어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 정부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현 정부가 불교를 탄압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딱히 어떤 행위를 통해서 이해를 이끌어낼지 막연하겠지만 방법이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선거 때면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그 후 눈에 빤히 보일 정도로 요식적으로만 불교를 대하니까 신뢰할 수 없는 종교정책을 펴는 정부로 의심받는 것 같다. 아까 상생의 길을 말씀 언급했는데, 정부에서도 남의 일로만 여기지 말고 각 종교가 서로 상생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플랜을 세웠으면 한다.

‘산’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일까? 불교와 산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재가불자들의 자생적인 산악회가 불교계에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모쪼록 모든 종교가 화합하며 함께 산에 오를 날도 속히 오길 바란다.

▲서울불교산악회가 지난해 9월 창립 2주년을 맞아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제공:서울불교산악회).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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