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오래 전에 읽었던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책장에서 다시 찾았다. <아리랑>은 남과 북, 만주, 중국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한민족의 설움과 고난의 역사를 소설 형식으로 정리했다. 그중 한 구절이 가슴을 때린다.

“우수리스크역에는 기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역에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넘겨졌다.…(중략)… 사람들은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화물차를 한 칸씩 채워나가고 있었다. 화물차는 어찌나 많이 연결되어 있는지 그 끝이 까마득해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고려인’이었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를 일컫는 말이었다. 러시아어로는 ‘카레이스키.’ 1863년 가난을 피해 조선에서 러시아로 이민을 떠난 한인들과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인 고려인들. 이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을 당했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그 땅을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잡았다. 그곳에서 논과 밭을 일구고 살아보려 노력했다. 가난의 고통과 이방인의 차별과 서러움을 이기고 그들은 러시아내에 대표적으로 성공한 소수민족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6일 끝난 2011 동계아시안게임이 열린 곳이 바로 오래전에 고려인들이 집단이주했던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알마티다. 피와 땀, 눈물로 얼룩진 고려인들이 성공의 결실을 이뤄낸 장소이다. 고려인들은 이번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스포츠가 이어준 핏줄의 쾌거를 접하고 ‘환호작약’했을 것이다.

같은 핏줄인 한국 선수단이 동계스포츠 강국으로 금메달 13개의 놀랄만한 성적을 올리는 것을 보고 한민족의 자긍심을 느꼈을 법하다. 게다가 고려인들을 특히 기쁘게 한 것은 카자흐스탄의 피겨스타인 데니스 텐(18)이 남자 피겨스케이팅 싱글부문에서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던 일이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고려인인 텐은 화려한 점프와 회전 기술을 펼치며 일본의 무라 다카히토를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텐은 구한말 원주 진위대 특무정교(지금의 준위)로 근무하다 1907년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 선생의 후손으로 카자흐스탄에서는 ‘아이돌 스타’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텐의 가족사는 조정래 소설 <아리랑>의 작중인물들의 삶과 진배없다. 일제와의 독립투쟁으로 인한 고초와 가난을 피해 연해주로 피신하고,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갔다. 텐의 할머니 김 알렉산드리아(67)가 민긍호 선생의 외손녀이다. 알마티에서 태어난 텐은 태권도를 하며 한국과 인연을 이어 나갔으며 10세 때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했고 일찍이 소질을 보여 2008~2009 국제빙상연맹 주니어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에는 밴쿠버 올림픽을 앞두고 전주에서 열린 4대륙 대회에 참가해 한국에서 시니어 데뷔무대를 가졌으며 4월엔 러시아 볼쇼이 아이스쇼 팀에 속해 한국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 텐의 우승소식을 접하면서 고려인 출신의 세계적인 스포츠스타 넬리 킴의 모습이 다시금 생각났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 체조에서 사상 처음으로 만점 연기를 펼친 루마니아의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에 필적하는 환상의 경기력을 발휘하며 금메달 3개를 따낸 넬리 킴은 한국 언론에게 단연 최고의 뉴스원이었다. 한국과 소련이 냉전체제로 인해 냉랭했던 시절 넬리 킴은 특별한 소련 당국의 단속으로 인해 자유스런 인터뷰를 하지 못했지만 동서냉전의 대치가 끝나고 화합제전이 된 88 서울올림픽에 국제심판으로 자원, 말로만 들던 할아버지 나라에 첫 발을 내딛었다.

소련 선수단의 일원인 넬리 킴의 취재는 필자를 비롯한 한국 기자들에게는 흥미와 관심을 모을만했다. 1957년 카자흐스탄 태생으로 아버지는 건설업을 하는 블라디미르 김, 어머니는 타타르인이었던 넬리 킴은 경주 김씨인 할아버지가 일본 압제에 항거하다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 방황이 시작됐다. 아버지에게서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곤 했다는 넬리 킴은 뒤늦게 조상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됐으며 서울올림픽을 보고나서 마음이 바뀌었다며 “나에겐 체제나 사상보다 내 핏줄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후문이었다.

넬리 킴은 이후 대한체조협회 기술고문 등을 맡아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남편 발레리 모프찬(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사이클 금메달리스트)과 이혼한 후 현재는 미국으로 이주,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니스 텐과 넬리 킴 같이 성공적인 고려인 스토리를 보면서 국적과 지리적 배경의 차이를 넘어 한민족의 핏줄을 확인시켜 준 스포츠의 위력에 진한 감동을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동계아시안게임 기간 중 한국 선수단의 성적에 눈길이 가면서도 개최지가 고려인들의 삶터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각별하게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세계 속으로 다양하게 퍼져 살고 있는 한민족 중에 척박한 환경에서 비옥한 삶을 일궈낸 고려인들의 강인한 의지와 기상을 접하고 싶어서였다. 마침 대회 막판 데니스 텐의 우승은 한민족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빛나는 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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