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들이 말은 아꼈어도 내심 충격적이었을 사건이 얼마 전 일어났다. 한 경찰 간부가 보험금을 노리고 친어머니를 살해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도덕불감증의 현주소며, 무너진 사회의 현주소다. 본인에게 책임을 떠넘길 일 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온 국민이 神에게 석고대죄 해야 할 천인공노할 일이 이 나라 이 백성에게서 발생한 것이다. 문화수준이 높고 경제 대국이 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륜이 무너진 나라로 대한민국의 명함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모든 나라가 하나 되어 나아갈 때, 우리는 둘로 갈라져 서로 미워하고 훼방하고 죽이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이 작은 나라는 둘이 됐고, 그 둘은 다시 천 갈래 만 갈래로 생각과 지역이 갈라지고 흩어지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이같이 비정한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각골통한(刻骨痛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에겐 신성이 있다. 저 그리스 아테네 지방을 전도하던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했듯이, 이 민족도 마찬가지로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민족이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라는 말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종교와 함께 그 맥을 이어왔다.

변질된 종교,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각종 사회의 기현상들, 분명 종교를 모르거나, 알았다 해도 다시 거역했거나 하는 사연으로 인함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같은 사연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마치 예수를 배반한 유다로 인해 유럽의 800만 이스라엘 백성 중 600만이 희생당한 역사를 기억할 것이다. 나치의 히틀러로부터 자행된 이름만 들어도 끔찍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건 말이다.

그처럼 하나의 민족이 갈라지고, 나아가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허락할 때는 틀림없이 그만한 신의 노여움이 있었으리라. 모든 종교는 믿고 따라야 할 신의 계명이 있다. 그 중 기독교에도 십계명이 있으며, 첫 번째가 바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엄명이다. 물론 나름의 사연은 있었겠지만, 인생사엔 바로 그런 사연이 있기에 지키라는 신의 계명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사참배(紳士參拜), 나라를 빼앗은 도적인 천황에게 절하기 위해 자기가 믿는 종교와 신을 버린 것이다.

그 뿐인가. 이같이 그릇된 신앙의 주인공은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돈과 명예와 권력의 상징이 되어버린 장로교다. 이 장로교는 중세교회의 마녀사냥으로 유명한 칼빈의 후예요 교단이다. 예정론의 5대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서 화형으로 다스린 교단이다. 종교란 이름은 가졌으나 종교성은 없는 교단이다.

이러한 교단의 대표성을 지닌 조직이 바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다. 이 한기총은 종교를 위해 탄생하고 또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해서 오늘날 정치와 권력과 하나 되어 돈과 부정과 음란과 광란의 상징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 결과 이 한기총마저 스스로 “두 쪽 난 한기총”이란 신임 대표회장의 고백을 듣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이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타락된 종교는 더 이상 이 사회를 교화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우선 자정능력을 잃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연(蓮)은 연못에 있다. 연못의 물은 고인 물이다. 이 고인 물은 더러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더러운 물에 떠 있는 이 연은 더러움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연꽃을 흠모하는 것이다. 이처럼 더러운 물과 하나 되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그 연뿌리의 자정능력 때문이다.

더러운 물에 있어도 더러움을 걸러내며 자신을 지킨 결과가 바로 모든 사람에게 경이로움을 주는 승화된 꽃이다.

이것이 바로 이 험악한 세상에 종교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는 그 자정능력을 잃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친어머니를 살해해야 하는 현실, 패륜이 판을 치고, 순리는 없고 역리만 존재하는 세상에 우리는 놓여 있다. 그것은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교훈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제라도 종교의 본질을 회복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가 살아야 사회와 인류가 살 수 있음을 이 기회에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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