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공원 ⓒ천지일보 2019.10.22
장충단공원 ⓒ천지일보 2019.10.22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남산 동북쪽에 위치한 장충단공원. 남산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공기로 한적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휴식처이다.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며 공원을 거닐면 그간 쌓인 피로감이 확 줄어드는 느낌을 주곤 한다.

◆고종황제 명으로 건립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장충단공원 입구다. 얼핏 보면 일반 공원처럼 보이나 이곳은 역사의 자취가 담겨 있는 조금은 특별한 장소다.

이곳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관련된 곳이다. 1895년 발생한 을미사변 후 일본 자객과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병사들이 맞서 싸우지만 결국 숨진다. 이후 이들을 혼을 기리기 위해 1900년 고종황제의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곳에 사당과 장충단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0년 한일합병과 동시에 사당이 허물어지고 비석이 뽑혔다. 또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라는 절이 세워졌고 일본식 공원으로 바뀌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유관순 열사, 이준 열사, 이한응 열사와 사명대사 동상이 세워져 과거를 생각게 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보통 장충단 공원은 인근의 주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알고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특히 공원 입구에 세워진 장충단비는 이곳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핵심 열쇠다.

장충단비는 광복 후 다시 찾아와 신라호텔에 세워졌다가 1969년 이곳에 옮겨온 것이다.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담은 비석으로 앞면의 글씨는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지었다. 뒷면의 비문은 조선 말기 문신인 민영환이 지었다. 장충단비는 을미사변 때 희생된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장충단은 노랫말 속에도 고이 담겨 있다.

‘누구를 찾아왔나 /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

1960년대에 발매된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안개 자욱한 고요한 공원을 연상케 하는 느린 템포의 노래는 슬픔을 간직한 장충단을 아련히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수표교 ⓒ천지일보 2019.10.22
수표교 ⓒ천지일보 2019.10.22

◆청계천 수표교도 옮겨와

인근에는 청계천 수표교도 있다. 1960년대에 청계천 복개 시 수표교를 이곳에 옮겨왔다. 수표교는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도시기반시설을 위한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것이다. 조선 초 한양은 하수시설 미비로 장마 때마다 홍수 피해가 컸다.

태종실록에 보면 1404년 7월 개성에 홍수가 나서 시내의 수위가 10여척이나 됐다. 수문이 파괴되면서 성벽도 무너졌고, 100여채의 가옥이 파괴되기도 했다. 수표교는 원래 소나 말을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렸다. 그러다 세종 23년(1441년) 수표(보물 제838호)를 만든 후 다리 옆에 세워 청계천 물높이를 재도록 했다. 정월 대보름 즈음이 되면 수표교에서는 연날리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열렸다. 연이 날려지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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