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이는 ‘백제 고모루성’ 포천 ‘고모리성’인가(3)
[다시 쓰는 백제사]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이는 ‘백제 고모루성’ 포천 ‘고모리성’인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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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고모리산성
고모리산성

고모리 산성을 답사하다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산64. 모처럼 단비가 내리는 6월 초, 글마루 취재팀은 고모루성을 답사했다. 어디서부터 성을 찾을까. 농무가 짙은 고모리 산에서 토성의 유구를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성 밑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물어 산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오르다보니 근년에 소로를 넓힌 언덕이 보였다. 민묘를 조성하기 위해 정비한 주변에서 뜻밖에 백제 토기조각을 찾았다. 그리고 이 지역을 기점으로 양쪽 산으로 오르는 길에 정연한 토루(土壘)가 확인되었다.

내·외면을 고준하게 깎아내린 토루 위에서는 할석(割石)들이 나타났다. 할석과 흙을 다져 단단하게 축조한 성이었다. 백제시대 전형적인 판축(版築) 토루였다. 토루를 따라 올라가니 장대와 건물지가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토루 위에는 오랜 연륜동안 떨어져 쌓인 나뭇잎들로 토기나 와편은 수습되지 않았다.

고모리산성은 비득재(해발 254m)에 위치한 고모산(일명 노고산, 해발 380m)에 축조됐다. 산성은 고모산 정상부와 계곡을 에워싸는 포곡식(包谷式)이다. 포곡식은 본래 북방계 축조형태로 백제 초기의 성들이 대부분 이런 축조방식을 취했다.

포천에서 서울(구리) 방향으로 침입하는 적을 통제할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성 축조 방식은 흑과잡석을 섞어 쌓은 혼축 성이다. 서천 건지산성, 충주 대림산성의 형태와 비슷하다. 성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북으로 긴 변형된 장방형 형태로 남쪽이 험준한 대신 북쪽이 낮은 형상을 하고 있다.

2001년 단국대학교 박경식 박사가 이끄는 매장문화재연구소의 지표조사에 따른 보고서에는 대략 다음과 같이 고모루성을 기술하고 있다.

“이 성의 전체둘레는 1.1㎞ 정도이고, 토루에 일부 구간만 석축을 하였으며 성내에서는 많은 양의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성은 포천 방면에서 서울 쪽으로 진입하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성시기 백제의 전형적인 백제 산성으로 주목되고 있다. 고모리산성 성벽은 지표에서 보아 토축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단면부가 드러난 곳을 보면 성벽 하단부가 할석으로 축조된 곳이 있어 토석혼축도 함께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동벽의 경우 석축구간도 눈에 띄는데, 조잡하기는 하지만 석축이 뚜렷하여 취약 구간은 돌로 축조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토축 성벽의 축조 방식부터 살펴보면 고모리산성은 일부 삭토법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성토법에 의하여 축조됐다. 삭토법을 사용한 곳은 서벽이 대표적이다. 서벽 외부는 평균 60도 이상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성벽 바깥쪽을 삭토하여 경사도를 높이고 상면에는 성토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토석혼축은 성벽부의 경우 할석을 막쌓기 형태로 2~3단 축조한 후 그 위로 성토한 것으로 보인다. 석축으로 축조된 곳은 동벽 일부 구간인데 성벽 단면에 대한 조사 결과 기저부에는 폭 2m정도 잡석을 깔고 그 위로 석축하였다. 석축의 높이는 2m도 못 되며 뒤채움 길이도 1m 정도로 본격적인 석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기저부를 정리하고 보강하였으며 큰 돌을 아래에 놓고 위로 갈수록 돌이 작아지며, 할석의 편편한 면을 전면으로 놓았다.

고모리산성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다량의 백제 토기가 수습되었다. 백제 토기류의 기종을 보면 양이부호·고배류·뚜껑류·심발형토기류·장란형토기류·호·옹류가 있는데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출토유물과 유사한 점이 많아 주목된다.(하략)”

포천문화원 내부
포천문화원 내부

포천시내 반월성은 고구려 ‘마홀’

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속칭 ‘반월성(사적 제403호)’은 고구려가 ‘마홀(馬忽)’로 삼은 치소였음이 확인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발굴 조사 때 ‘馬忽’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편이 찾아져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됐다. 고구려 평기와에 나타나는 굵은 선조문(線條紋) 바탕에 방형의 구곽(▨廓)을 만들고 ‘마홀수▨▨▨▨(馬忽受▨▨▨▨)’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를 발굴한 측에서 ‘馬忽受解空口單’이라고 해석, 포천문화원에 전시해 놓았으나 정확치 않아 보다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35 지(志) 지리조에 ‘포천군은 본래 고구려의 마홀군이었는데, 경덕왕 16(757)년에 견성군(堅城郡)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반월성(마홀성)은 고모루 산성과 더불어 고구려가 차지했을 당시 주요 성지로 이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마홀은 또 고구려 당시 ‘말갈족’을 지칭하는 것이어서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서술키로 한다. 반월성은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도 기록되고 있는데, 태봉왕 궁예의 설화에도 전해진다. 또 광해군 10(1618)년에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도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학술조사 결과 남북에서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장대, 망대 유구가 확인됐다.

호국의 맥 명신 이항복 유적

경기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는 조선 중기의 명신이었던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있다. 바로 사액서원인 화산서원이다. 고모루산성이 백제호국의 관방이라면 백사는 조선난국극복의 명신이다. 이 서원은 백사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635년(인조 13)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창건되었다. 1720년 숙종 임금으로부터 ‘화산(花山)’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4칸의 인덕전(仁德殿), 내신문(內神門), 동서 협문(夾門), 각 3칸의 필운재(弼雲齋)와 동강재(東岡齋)·외신문(外神門) 등이 있다. 이 서원은 지금도 선현에 대한 제사와 인성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항복 선생은 지극한 효자로서 1580(선조 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참의, 도승지 등을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전쟁기간에는 군대를 정비하고 왜적 퇴치에 주력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영의정에 올라 난국수습에 헌신했으며 청백리로 녹선됐다. 지난달 필자는 민간에 소장된 백사선생의 수적인 간찰(簡札)을 찾은 바 있다. 한림학사 시절 성균관 학우 신생원(申欽으로 추정, 후에 이항복 선생의 신도비문을 지음)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백사의 인간미가 넘쳤다. 9세에 부친을 잃고 15세에 모친을 여읜 백사는 항상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는데, 편지에 평소 고인들에 대한 생각과 그 마음으로 병까지 얻었다(傷孝)는 내용이 적혀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 5)년에 헐렸으나 위패는 무덤 앞에 묻어두었다가 1971년 복원, 잘 정비돼 있다. 포천시는 화산서원을 학생들의 전통문화체험, 충효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오성과 한음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화산서원
화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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