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李昇薰 1864~1930)

남강 이승훈 선생은 조선조 말기인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인환(寅煥), 자(字)는 승훈(昇薰), 호(號)는 남강(南岡)으로 1919년 3·1독립운동 시 기독교 측 대표였다.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 선생은 1907년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발전에 공헌,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주정신으로 일생을 교육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이승훈 약력

호(號) 남강(南岡), 본명은 인환(寅煥)
생년~졸년 1864-1930
1864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1879 납청정(納淸亭) 임일권 유기상점의 점원 생활
1893 상점 경영 시작
1899 오산면 용동으로 이사하고 승천재(陞薦齋)를 세워 소년 교육
1901 선천(宣川)의 부호 오희순의 후원을 받아 평양에서 무역상을 경영하기 시작
1907~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대각해, 승천재(陞薦齋)를 다시 지어 강명의숙(講明義塾)세움. 그 후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여 신학문과 애국사상 고취에 주력.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신민회 관할 산업기구로서 마산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설립.
1910 기독교에 입교
1911.5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
1911.9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4년 2개월간 복역
1915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 세례를 받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됨.
1919 기독교 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 선천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 3년형 선고
1922 가출옥 후 용동에 자면회(自勉會)를 창립해 활동
1922.12 일본을 시찰하고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
1923 조선교육협의회 간부로 민립대학(民立大學) 기성회를 추진
1924~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물산장려운동(物産?勵運動), 민립대학 설립 노력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의 고취를 위해 분투 노력
1930 병사(67세)
1962 건국공로훈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우리가 할 일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일이지 남과 연결하여 남의 힘을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자기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 1922년 봄 -

시련은 꿈을 위한 준비

1864년 평북 정주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남강(南岡)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려서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고아가 된 남강은 학업을 중단한 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임일권(林逸權)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방사환(房使喚)으로 일하게 된다.

남강은 14세까지 유기 상공업을 하는 임일권의 집에서 일하면서 유기 제조공정과 상업 경영의 거래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성실과 정직함을 인정받아 수금원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어린 남강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보다 열심히 보다 부지런히 삶을 살아갈 줄 아는 소년이었다.

남강 인생의 황금기

남강은 15세가 되던 해 이도제의 딸인 이경강과 결혼해 자립하게 된다. 자립하게 된 남강은 보부상으로 장사를 시작, 특히 남강(南岡)은 이 시기에 정주와 황해도를 돌아다니며 장사뿐 아니라 자연과 지리에 대한 견문도 익히게 된다.

보부상을 하며 여러 사람을 사귀었고 나라 안,밖의 소식들도 접하게 된다. 처음에는 정주, 납청, 고읍에서 장사를 하다가 점차 평안도 일대를 다니게 되었고 나중에는 황해도의 안악, 재령, 봉산까지 진출하게 됐다.

그렇게 23세까지 보부상으로 착실한 기반을 닦은 남강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결과는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1887년 남강이 24세가 되던 해에 보부상을 청산하고 납청정(納淸亭)에 들어와서 오희순(吳熙淳)이라는 유지의 도움을 받아 유기 공장과 상점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으며,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상점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남강의 유기 공장은 환경이나 노동자 처우에 있어서 매우 모범적이었기에 타 공장에 비해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오산(五山)의 용동(龍洞)에다 이(李)씨의 친족촌을 만들고 서당을 마련해 자제들의 교육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즉, 이 시기의 남강은 보부상을 시작으로 유기 공장 운영과 판매, 무역상과 운수업을 하는 등 자신의 경영능력과 성실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이름을 떨쳤다.

이는 남강(南岡)의 기업 능력을 통해 경제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풍족한 시기였다. 그러나 유기 행상과 공장을 경영하며 모은 재산을 청일전쟁 때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지만 이 일이 남강에게 또 다른 희망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 삶을 힘들게 하는 시련은 될 수 없었다.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후 5년 만에 그는 벌써 평양에 큰 상사를 다시 개설하고 납청정(納淸亭)과 진남포(鎭南浦) 등에 지점을 두었으며, 서울과 인천을 통하여 외국과 거래하는 국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굳혔다.

남강은 경인선(京仁線)을 비롯한 철도의 개통과 외국 상선이 입항할 것을 미리 알아 운송 사업을 개시했으며 서울과 평양에 설립한 운수회사는 우리 나라 운송사업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업에 열중했던 그가 나라와 민족을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니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바로 그 계기가 된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모든 자본과 경영권을 정리하고 용동(龍洞)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망국의 한을 느끼고 시국의 아픔을 본 것으로 남강은 사생활을 정리하고 바야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공생활로 탈바꿈하는 준비 시간이 된 것이다.

1907년 남강이 44세가 되던 해 도산(島山)을 만난 것을 계기로 사생활을 청산하고 민족을 위해 교육과 종교, 민족운동과 사회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절대애국을 향한 그의 걸음

‘우리가 살아갈 길은 교육을 통해 힘을 길러 나가는 것에 있다.’

헤이그밀사사건과 고종(高宗)의 양위(讓位) 소식을 듣자 그는 개인의 일보다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해 7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단발, 금연, 금주를 단행하고 민족을 위해서 교육과 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의 큰 결심과 결단의 시작은 먼저 용동(龍洞)에 소학교인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워 신교육(新敎育)을 시작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해 12월 24일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중심인물들을 양성하게 된다.

남강의 대표적인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한 민족 진흥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은 남강은 평생을 민족 진흥운동에 헌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에 뒷받침될 수 있는 것이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교육진흥사상은 1907년 오산학교 개교식에서 그가 언급한 연설문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금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긴중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있으니 그들을 깨우치는 것이 급무이다.’

사실 그의 이러한 교육진흥사상은 도산 안창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며, 1907년 그의 생을 뒤바꾸어 놓은 평양에서의 안창호의 강연 역시 교육진흥론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안창호는 물고기를 바로 잡으려면 먼저 그물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후진들을 새교육으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이 나라를 구하는 첫째 방법이라고 역설하게 된다.

그는 훗날 당시 안창호와의 주고받은 대화를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이라고 회고한다.

한편 그는 민족의 진흥을 위해 신학문을 도입할 것을 결심, 처음 세운 강명의숙에서부터 신식교육을 가르치게 하되 처음부터 과목은 산수, 체조, 수신, 역사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거의 모든 학교들이 전통적인 구교육인 반면 그는 교육내용을 일신하여 다른 민족사학들과 함께 서양식 교육내용, 즉 자연과학 과목(물리, 화학, 생물, 수학, 산술 등)과 사회과학 과목(법학, 경제학, 지리, 역사, 정치학)을 도입했던 것이다.

이는 부국강병을 위하여 시급히 요청되었던 당시의 시대사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그의 교육진흥사상으로 말미암아 오산학교는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으며 졸업생들의 면면 역시 주로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 종교인 등으로 일제와 결탁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으며 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들로서 세워졌던 것이다.

한마디로 남강의 일생은 민족진흥과 애국운동에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친 일관성 있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은 그에게 있어서 민족회복을 위한 희망이었고 통로였던 것이다.

기독교사상으로 민주적지도자가 되어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몹시 괴로워하던 남강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한석진 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얻게 된다.

설교를 들은 후 그는 학교로 돌아와 교직원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학교에서 신앙집회를 갖기로 결심하게 된다.

남강은 민족이 다시 힘을 얻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사랑과 봉사, 헌신을 강조하는 기독교정신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해 12월 학교의 교육주지를 기독교사상에 근거해 라부열(Slacy L. Robert)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성경과목도 가르치게 된다.

특히 후에 교장이 된 유명모 선생과 조만식 선생은 오산학교의 신앙교육터전을 튼튼하게 세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비록 1922년 일제의 신교육령에 의거하여 1923년 11월에 기독교 교육주지는 삭제되고 일반학교가 되었으나 학교안의 신앙집회와 기도하는 분위기는 계속되었으며 신앙적인 모임과 예배를 통해 더욱 친밀한 동료의식 속에 생활하며 아침,저녁으로 찬송가 소리가 학교를 메아리쳤다고 한다.

한편 남강은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경·애·성(敬·愛·誠)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스승을 공경하며(敬),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며(愛), 진실하고 성실하게 거짓이 없이 사는 삶, 또 이를 따르는 학생들을 기르는 것(誠)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게 된다. 이것은 훗날 오산학교의 교훈인 ‘사랑, 정성, 존경’으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그가 강조한 의(義)의 교육은 기독교 사상에서 잘 나타나는데, 교육과 관련된 신앙의 형태로 이를 강조하고 의가 아닌 거짓이나 게으름이나 이기심이나 권모술수나 아집을 버리고 항상 큰 뜻 속에서 행하고 배우고 생활하도록 가르쳐 준 것이다.

남강은 자주 성경을 인용하여 훈화를 하였는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교훈은 훗날 졸업생들로 하여금 개인생활에 있어서 정직하게 함은 물론 일제와의 투쟁에 있어서 강건한 민족애를 발휘하도록 다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남강은 그의 교육의 방향성을 기독교 사상으로 귀결시켰기에 기독교 교육을 실천적으로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민족을 위한 그의 희생

남강은 1911년 2월, 서울에 가다가 경찰의 불심 검문에서 안중근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의 명함을 가졌다는 이유로 검거되고 1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를 당한다.

남강은 제주도에서 유배를 당하는 중에도 기독교 사상과 신교육, 새로운 정신을 주민들에게 전하며 교육과 문화 사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은 105인 사건에 남강을 얽매어 다시 서울로 압송해 구속한다. 이때에 일본은 우리나라 안에 있는 반일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인사들을 여러 가지 구실을 삼아 구금했는데 안명근의 무관학교 사건이나 105인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일로 남강은 105인 사건의 주모자라 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다른 5명과 같이 10년형을 언도 받게 된다. 훗날 남강은 이 사건을 ‘제주도 유배로부터 가출옥 될 때까지의 5년 동안 비록 육체적으로는 쇠잔되었지만, 성서를 탐독하고 신앙인으로서의 수양을 쌓아 정신적으로는 더욱 강해졌다’고 회고했다.

남강은 1915년 2월에 가출옥하면서 세례를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917년 그가 54세 되던 해에는 그 당시 극소수에 불과하던 교회 장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흩어졌던 주변사람들을 다시 모으고 남강을 중심으로 민족 운동과 개화운동을 하며 오산학교의 건물을 새로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쓰게 되었다.

그리고 국외의 많은 지도자들과 서로 연결해 국내의 책임자적인 위치에서 조국의 광복과 독립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해, 2월 28일 천도교 측 대표인 손병희와 최린, 기독교 측 대표인 남강과 함태영, 불교 측 대표인 한용운 등 33인 서명을 통해 준비된 독립선언문은 3월 1일 오후 1시반 경 태화관에서 낭독, 파고다공원에서는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남강은 이 운동의 전체적인 중심인물로 준비와 진행을 맡았으며, 만세 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다른 민족 대표들과 함께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어 수감된다. 남강은 대표들 중 최고형인 3년형을 언도 받아 3번째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같은 해 3월말에 독립운동의 중심 진원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오산학교와 오산건물을 소각, 폐허하고 폐교시켰다.

남강은 7월 21에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과 관계자 15인 등 48명 중 마지막으로 경성 감  옥에서 가출옥하게 된다. 옥고를 치르며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 남강은 다음 해에 이상재, 유진태 등과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해 전국의 사학교육을 지도하는 등 계속 그의 뜻을 펴나갔다.

남강은 1924년 회갑을 맞아 더 성숙되고 깊이 있는 민족정신으로 일하게 되는데, 5월에는 동아일보의 제4대 사장이 되어 일제에 맞서 민족의 언론 창달에 힘썼다. 또한,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해, 국내외 투쟁에 앞장서서 일하게 된다.

죽는 날까지 굽히지 않았던 남강(南岡)

남강이 65세가 되던 해, 졸업생들이 모교(母校)에 모여 오산학교(五山學校)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남강의 동상(銅像)을 세우기로 하고 제작에 착수, 2년 뒤인 1930년 67세가 되던 해 5월 3일에 오산학교 교정에서 제막됐다.

물론 남강의 동상을 세우는 일이 일본 총독부의 반대가 컸으나 민족지도자가 아닌 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의 명분으로 힘들게 승낙을 얻어낸 것이다.

그러나 세우고 보니 남강의 동상은 단순히 한 개인의 동상이 아닌,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싸운 오산학교의 기상과 신민회, 105인 사건, 독립선언 등의 많은 고난을 이기고 투쟁을 계속한 민족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의 정신과 상징이 서리어 있었다.

그러나 민족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오랜 옥고와 숨 돌릴 틈 없이 바빴던 그의 생활로 인해 5월 9일 새벽 4시에 협심증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남강의 장례식은 5월 17일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 유해(遺骸)는 선생의 유언대로 서울로 운구 되어 해부(解剖)를 하고 학생들을 위한 생리표본(生理標本)으로 철제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일본은 학생들과 조선 사람들에게 자극이 된다는 이유로 그 뼈를 강제로 수습해 오산학교 뒷산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남강이 남긴 말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해서 쓰게 하라(남강의 유언).’
조선 독립에 한해서는 나의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본이 조선의 합방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이로되 나는 이것을 반대할 의사가 없다. 그런데 합방이 된 것은 우리 조선 사람들이 지은 죄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립시켜 줄 것이다.
- 3.1 운동 당시 심문에 ‘일한합방을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느냐?’라는 질문의 답변으로 -

 

오산의 졸업생은 어디를 가나 어디에 있으나 거짓말을 하지 말고 남을 속이지 말고 자기가 맡은 일은 게을리 하지 말고 몸소 행하여 민족의 영광을 높이는 인물이 되라.
- 제1회 五山학교 졸업식에서 남강선생의 훈화 -

 

나는 어려서 빈천한 가정에 태어나 글도 변변히 못 읽고 여러가지 고생을 했는데 오늘 이같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 넘치는 일입니다.

내가 민족이나 사회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한 일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후진이나 동포를 위하여 한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한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입었으면 저런 동상은 몇 백 개를 세워도 참된 영생이 못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물질적 영구성을 구하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오래 살 바를 찾기를 바랍니다.
- 동상 제막식의 답사에서 -

 

내가 오산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한 것은 불과 사흘 동안이었는데, 이 사흘 밤을 한잠도 자지 못하고 그 일만을 생각했다.
- 오산학교 창립 때를 술회하며 -

 

지금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 내려온 강토를 원수인 일본인들에게 맡긴다는 것이야 차마 있어서는 안 된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긴중한 일은 백성들이 일어나는 일이다.  ...중략... 내가 이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을 가르쳐 만 분의 일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자리에 일곱 명의 학생밖에 없으나 이것이 차츰 자라나 70명 내지 700명에 이르도록 왕성한 날이 올것이니 일심 협력하여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한다.

우리가 할 일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 일이요, 이것을 찾아서 영광스러운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서는 해외에 나가는 일도 필요하고 밖에서 군대를 길러 쳐들어오는 일도 필요하다.

또, 세계의 여론을 일으켜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 남의 지원을 받는 일도 필요하다. 그러나 백성 한 사람이 깨어 일어나 밝고 덕스럽고 힘 있은 병에 7년 묵은 쑥이 약이 된다고 하거니와 그 쑥이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묵혀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 방방곡곡에 흩어져 백성 속에 들어가 그들을 깨우치고 그들의 힘을 길러 민족 광복의 참된 기틀을 마련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은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을 수가 있느냐?’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義菴)의 이름을 먼저 써.
-독립 선언문 서명을 하면서-

참조: 크리스챤북뉴스 박상돈의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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