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우 전 동의대 철학과 외래교수

ⓒ천지일보 2019.7.17

언제부턴가 잊을만하면 유명인들의 자살 소식이 매스컴을 장식하곤 한다. 얼마 전 중견 배우인 전미선씨에 이어 시사평론가로 유명한 정두언 전 의원이 며칠 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각자 사연은 다르지만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극단적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 달리 말해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유이자 선택의 권리이다.

20세기 중엽 프랑스의 소설가로 현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로 활약했던 프랑수아즈 사강은 일찍이 기성 사회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외친 바 있다.

그녀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자유주의를 펼쳤다. 마약을 하든 자살을 하든 신체를 파괴하던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개인의 권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우처럼 무인도에 살지 않기에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일단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만약 허용될 수 없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사회학자 뒤르켐은 그의 저서 ‘자살론’에서 자살의 성격을 여러 유형으로 분석한 바 있다.

첫째 이기적 자살이다. 가장 많은 유형으로 일상적인 현실과 좀처럼 타협 또는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살이 해당된다. 정신질환자의 자살도 이 경우에 속한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전반적으로 팽배해있는 사회에서 자주 일어난다.

두 번째 이타적 자살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 또는 집단에 지나치게 결속되어 일어나는 유형이다. 집단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닌 사회에서보다 자주 일어난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 가미카제나 무슬림 무장단체의 자살 테러 등이 이에 속한다.

셋째 아노미적 자살이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지던 가치관이나 사회 규범이 혼란 상태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자살 유형이다. 서로 다른 가치 규범이 뒤섞여 있는 사회, 급격한 변동의 와중에 있는 사회에서 아노미적 자살이 더 자주 일어난다. 예전 IMF 경제 위기 시절에 많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숙명적 자살이 있다. 사회가 과도하게 욕망을 억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절망 속의 자살을 낳는 것이다. 노예의 자살이 대표적이다.

뒤르켐에 따르면 이유야 어쨌든 자살은 엄연히 사회 현상이며 자살의 원인 역시 사회적이다. 뒤르켐은 자살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여러 가지 통계 자료를 조사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정신병이나 신경쇠약증 같은 것이 자살과 확정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노무현, 노회찬의 죽음에 이어 합리적 보수의 길을 추구한 정두언 전 의원의 죽음 또한 원칙과 상식, 합리적 진보와 보수, 품격의 정치가 극단의 진영논리 속에서 갈 길을 잃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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