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박준성 기자]부처님 오신 지 2600여 년,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이들을 만났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불교는 1700년 가까운 장구한 세월 동안 이 땅에 있던 다양한 신앙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붓다 다르마>는 바르고 높고 크게 깨달은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가르침이다.

그런데 가르침은 으레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의 생각이 덧붙여지게 마련이라 세월이 지나고 가르침이 설해지는 지역이 달라지면서 처음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에 살이 더해지거나 뼈가 깎여나가고 어떤 때는 색까지 덧칠해져 본래 모습과 다른 형상이 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달라진 모습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고착되거나 때로는 잊혀졌다.
 
고착된 가르침은 권력화되고 권력에 몸담은 이들은 기득권에 안주한다. 안주가 몸에 익은 이들은 본래 있던 땅으로의 복귀를 주저하고 때로는 반대하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갖고 있던 권력을 내놓고 새롭게 시작하는 데는 결단이 필요하고 결단에는 항상 그렇듯이 위험이 따르지만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용기가 그 장애를 넘게 하는 힘이 된다.

관례라는 말이 있다. 익숙해진 일이라는 뜻이다. 있던 관례도 오래되면 잊히고 사라져 없는 관례가 되는데 관례라는 것은 워낙 강고해서 새로운 관례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벅찬 일이다. 누구든 스스로 안주의 틀을 깨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를 심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것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이다. 환하게 웃는 표정이 일품인 포대화상의 게송에 나오는 말이다. 모심기를 하는 논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농사를 망치는 일이다. 물러나는 것이 곧 나아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오늘날 불교계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배부른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길을 가는 불교 아닌 불교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을 신앙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당신이 믿음의 가운데 세워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당신께서는 그저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일 뿐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입멸의 현장에서 하신 말씀이 당신의 몸 아닌 가르침을 보라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젊은 날 세속의 보장된 영화를 포기하고 출가하신 까닭은 죽은 다음에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괴로운 삶을 끝내고 의미 있고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은 그렇지 못하다. 세속의 욕망으로 찌든 기원으로 눈을 뜨고 죽어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의 바람으로 눈을 감는다.

종교는 그런 무명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밝게 깨어나라고 경종을 울리는 대신 인간이 원래 그러는 것이라고 동조하고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한다.
 
“몸을 보는 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법을 바라보는 이 비로소 나를 보게 될 것이다”고 하신 부처님 가르침이 새록새록 새롭다.

<붓다다르마> 성열스님 / 문화문고 / 인터넷판매가 2만 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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