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그 해가 그 해, 올해도 또 그 해로 한 해가 저문다. 세월이 날개를 치며 난다. 젊은 한때 저 나이 드신 분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 젊은 시절은 어느덧 가고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느냐고 물을 나이가 되고 말았다. 세월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나이는 먹어가지만 살아 보니 내 자신과 가족, 친구와 이웃, 세상과 얽히고 설킨 인연 때문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많다. 모험은 두렵지만 아직 감당할 만큼은 벌여야 할 일도 많고 정리해야 할 일들도 있다. 정리하면서 살고, 살면서 정리도 하고 또 벌이기도 하는 것이 꼭 나이와 상관 지을 것 없는 보통 사람의 삶인 것 같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난 밤새 내린 눈이 깜짝 다른 새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서프라이즈(Surprise)! 어둠이 덜 걷힌 이른 아침까지도 소리 없이 흰 눈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눈발에 어둠이 하얗다. 하얗게 어둠이 샌다. 눈은 신비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경탄이며 감동 그 자체다. 비 온 뒤의 오색 무지개가 가슴을 뛰게 하고 설레게 하듯이 눈 또한 그러한 것 같다. 내리는 눈에 기쁨을 느끼는 것이야 나이 먹고 안 먹고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릴 때 같으면 눈이 온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맨발인 채라도 밖으로 뛰어 나갔을 것이다. 눈은 항상 이렇게 무엇인가에 묶여 있는 것 같은 나를 풀어주고 해방시켜 주어 왔다. 이것이 눈 내리는 겨울과 눈을 철없이 기다리곤 했던 이유다.

그렇지만 눈이 오는 건 좋지만 그 눈에 세월이 녹아내린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세월을 훔쳐간다. 이것을 안 때로부터는 눈은 나를 환호작약(歡呼雀躍)하게 해주지만은 않았다. 어떤 때는 슬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겁고 우울하게 내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또 한 해가 어디론가 꼬리를 빼는 시점인 섣달 하순의 아침, 이 아침에 쏟아지는 눈도 그러했다.

눈은 세월의 하중(荷重)을 줄이기 위해 쏟아 부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몇 번인가를 쏟아 붓고 나면 몸이 가벼워진 세월의 유속(流速)은 더욱 빨라진다. 길고 길 것만 같았던 겨울도 어느새 금방 휩쓸어 가버리고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또 겨울을 파노라마처럼 되풀이 실어다 주지 않는가. 작년 겨울의 경험은 얼마나 멀리 있으며 내년 겨울은 또 얼마나 멀리 있을 것인가. 이미 지나 갔거나 앞으로 오거나 다 촌음(寸陰)의 거리가 아닌가.

이 덧없는 세월이 펼쳐 보이는 계절의 순환은 나이가 들수록 가속도가 붙어 사람을 처연하게 한다. 비유하자면 사람의 일생은 일정 시간 타다 꺼지는 짧은 촛불의 심지에 불과하다. 그 심지의 타들어감이 점점 더 빨라지지 않는가. 그렇기에 촛불의 심지를 태우고 지나갈 공휴일, 휴가, 명절, 축제일과 기념일이 푸른 꿈을 가진 나이였을 때처럼 애타게 기다려지지 않는다. 그런 날들이 뜀박질해 달려오는 것이 싫다.

한때는 성큼 한 발치 앞에 와 있는데도 왜 그렇게 아득히 멀리 있어 보였는가. 그때의 시간은 너무 더디고 심지어 멈추어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의 재고(在庫)가 큰 연못에 잠긴 물처럼 넘쳐났기에 유실되고 낭비되는 시간도 아깝지가 않았다. 땀 흘리는 시간은 인생의 결실을 영글게 하지만 시간의 낭비는 나중에 회한(悔恨)으로 되갚음 된다는 얘기도 그 한 때는 짜증나는 잔소리일 뿐이었다. 그 쓴 잔소리가 지금 생각하면 좋은 약이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인생이 한낱 허망한 꿈이라고 슬픈 운율로 말하지 말라(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life is but an empty dream)’고 그의 시 ‘인생 찬가(A Psalm Of Life)’에서 읊었다.

그는 ‘죽은 과거는 죽은 과거로 하여금 땅에 묻게 하고, 살고 있는 현재에 활동하고 행동하라(Let the dead Past bury its dead!, Act-act in the living Present!)’라고 외쳤다. 과거는 과거다. 흘러간 과거는 이미 죽은 것이므로 집착하거나 회한에 매몰될 일은 아니다.

롱펠로우는 또 ‘아무리 즐겁더라도 미래를 믿지 말라(Trust no future, howe’er pleasant)’고 했다. 롱펠로우의 이 말처럼 흘러간 과거만큼이나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에 환상을 갖는 것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다. 과거에 한 일이 많았건 노는 것이 많았건, 유실된 시간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살아 있는 현재의 당면한 할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진정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롱펠로우의 말은 옳다.

“인생은 현실이고 진지한 것이지 무덤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너는 흙이고 흙으로 돌아가리라’ 했지만 그것은 영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Life is real! Life is earnest! And the grave is not its goal; Dust thou art, to dust returnest, Was not spoken of the soul)”라고 한 것과 같이 누구든 육체가 묻혀서 썩어 흙이 될 무덤이 가까워질지언정 현재의 삶을 절망할 이유는 추호도 없는 것 아닌가.

날개 치며 나는 세월이 무섭다. 곧 또 해가 바뀐다. 새로운 한해가 바로 눈앞이다. 그렇지만 주관자의 마음인 세월의 오고감에 집착은 포기하기로 했다. 내가 ‘가라’ ‘마라’ 한다고 내 말 들을 세월이 아니지 않은가.

올 테면 오고 갈 테면 가라. 또 눈이 오면 그때는 맨발은 몰라도 어릴 때 환호하던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현재에 충실한 삶의 모습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충실한 현재가 모여 밝은 미래가 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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