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색 바랜 곧 떨어질 것 같은 나뭇잎들 사이로 오후 내내 바들거렸던 가을볕이 사라졌다. 만추의 짙은 색채가 낙엽처럼 거리에 뒹굴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버스 정거장은 황량했다. 나는 지팡이를 의지한 채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버스가 왔다. 차에 오른 나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서 차 안은 승객들로 꽉 들어찼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 나이와 비슷한 베레모를 쓴 고집스럽게 생긴 노인 하나가 힘겹게 올라왔다. 그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지쳐 보이는 노인은 비좁은 승객들 틈을 헤집고 들어와 하필이면 내 앞에 버티고 섰다.

그를 위해 내가 일어 설 수는 없었다. 주위 자리에는 나보다 훨씬 젊은 것들이 죄 차지하고 있으니까.
버스가 달리는 동안 그 노인은 계속 나만 째려보고 있었다. 노인과 나의 버티기 작전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그가 차츰 미워지기 시작했다. 자리를 양보 받으려면 차라리 젊은 것들 앞에 서 있을 것이지 도대체 뭘 하자는 거지? 하긴 젊은 것들이라고 별수 없지, 노인 공경이 퇴색해 버린 지가 언제라고, 노인 권위 따위가 먹혀들 리가 없지.

나를 불편하게 하는 베레모 노인의 음흉하고 고집스럽게 생긴 모습을 보니 알 만했다. 젊은 시절 어지간히 자신의 욕망 채우기에만 급급한 일상을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일방 그의 못마땅한 행동은 문득 내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내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앞좌석의 손잡이를 바투 쥐었다. 그런 갈등으로 시간이 흐르는 사이 그 노인이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나는 영문을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처음부터 그 노인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순간 뇌리를 후려치는 것이 있었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아직도 이기심을 잔뜩 끌어안고 있는 바로 내 자신이었다. 노인에 이르렀음에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근성을 아직도 짊어지고 있었다. 이런 저런 혼란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나는 내려야 할 정거장 몇 군데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지나간 젊은 날을 오만과 편견, 아집 따위로 일관해 온 무거운 짐은 진작 내려놓았더라면 내려할 정거장을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나는 서둘러 버스를 내렸다. 지나쳐 버린 정거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가을 밤안개가 내리기 시작한 거리를 두리번거렸으나 이젠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정거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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