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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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산객 증가에 산불 위험 ↑
조선, 강원도서 산불 빈번
가벽 세우고 물 비축도록 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푸릇함이 피어오르는 계절인 4월. 절기상으로 5일인 식목일이 있고 6일인 청명(淸明)이 지났다. 청명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을 지닌 말로 ‘봄농사 준비’를 하는 절기다. 이 시기에는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청명에 날씨가 좋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고 어획량도 증가한다고 점쳤다. 

하지만 4월은 산불이 잘 발생하는 계절이다. 봄철은 전국에서 본격적인 영농준비로 논·밭두렁 소각이 많아진다. 성묘객과 등산객, 산나물 채취자 등 입산객 증가로 산불 발생 위험도 커진다. 건조한 날씨 역시 한몫을 한다.  

최근 강원도 산불이 발생해 많은 재산피해를 일으켰다. 강원도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속초 시내까지 번진 주요 원인으로 ‘양간지풍(襄杆之風)’이 지목됐다. 양간지풍은 봄철에 영서지방에서 영동지방으로 부는 국지풍으로, 고온건조하고 풍속이 빠르다. 또한 최근 10년간 청명·한식일 전후(4월 4∼6일) 3일간 평균 15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조선시대에도 산불 방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산이 삶 그 자체였던 시대였고, 잿더미로 변해버린 수풀을 원상복구 하기란 여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불 발생, 인명피해로 이어져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성종 20년인 1489년 3월 25일 강원도 양양에서 큰 산불이 발생해 민가 205호와 낙산사 관음전에 화재가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2005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발생한 양양·낙산사 산불도 조선시대에 발생한 산불과 동일한 지점이었다. ‘승정원 일기’에는 인조 21년인 1643년 4월 20일 강원도 양양에서 큰 산불이 났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 13년인 1789년 5월 14일에는 산불이 무려 3건이나 발생했다. 산불로 인명피해도 발생했는데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곳은 현종 때 강원도 동해안 산불로, 65명이 사망했다.

이렇다보니 국가적인 산불 예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종 15년 (1415)에는 방화벽(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벽)을 세웠다. 또한 태종은 ‘경칩 이후 불을 놓지 말라’며 금령을 내렸다. 가택 밀집 지역은 화재가 발생하면 옆으로 불이 쉽게 옮겨 붙으므로 중간의 집을 헌 후 물을 비축할 수 있도록 했다.

◆문헌 속의 산림 관리법

소나무를 중시했던 조선은 특별한 산 관리법도 있었다. 먼저 서울 안팎에서 묘소의 조성이나 벌채를 금지토록 했다. ‘사산금표도(1765)’에 따르면 서울 도성 안팎에 장지(葬地)를 만들지 못하도록 했고,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는 표석을 세워 경계를 기록했다.

사산(四山)은 백악(오늘날 북악산), 인왕산, 타락산(낙산), 목멱산(남산)을 가리키는데, 지도 상단에는 지도에 표시한 경계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글을 담았다. 소나무를 보호·육성하기 위해 제정된 일정의 규정집인 ‘송금사목(1788)’도 있다. 소나무가 국정의 하나로 여겨지므로 비변사에서 지정된 송전(松田, 소나무가 많이 있는 땅)의 남벌을 금하고 보호·육성해야 한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재정, 군정에 관한 사항을 모아놓은 책인 ‘만기요람’에도 소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벌채를 금한다는 내용과 궁궐 영건에 필요한 목재를 조달해온 지역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건조한 봄철에는 산불로 인한 손실을 막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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