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김봉곤 교수 “동학·3.1운동, 모두 비폭력·평화 운동 지향해”
[3.1절 100주년] 김봉곤 교수 “동학·3.1운동, 모두 비폭력·평화 운동 지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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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전북=이영지 기자] 지난 22일 본지는 동학농민혁명의 고장 전북에서 김봉곤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를 만나 천도교와 동학농민혁명 운동, 동학과 3.1운동의 연계성, 전북 독립운동의 특징 등을 들어봤다. 김봉곤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3.1
[천지일보 전북=이영지 기자] 지난 22일 본지는 동학농민혁명의 고장 전북에서 김봉곤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를 만나 천도교와 동학농민혁명 운동, 동학과 3.1운동의 연계성, 전북 독립운동의 특징 등을 들어봤다. 김봉곤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3.1

인내천, 독립정신으로 이어져

3.1운동 “개벽 알리는 소리”
동학 “민족·민중운동 원류로 평가”

[천지일보 전북=이영지 기자] “‘부득이하여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부득이하여 조선 정부군 및 일본군과 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은 녹두장군이라 불린 전봉준이 체포되고 최후에 진술한 내용이다. 이 진술을 보면 동학 농민군의 무장 투쟁이 ‘부득이한 정당방위’였음을 알 수 있다. 동학과 3.1운동은 모두 비폭력 평화운동을 지향한 것이다.”

지난 22일 김봉곤 원불교 사상연구원 교수가 한 말이다.

3.1절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많은 역사학자가 의미와 뿌리를 동학 정신에서 찾고 있다. 이에 기자는 동학 정신과 3.1운동의 연관성 등을 알아보기 위해 김봉곤 교수를 만났다.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에서 만난 김봉곤 교수는 “전북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도화선이 돼 정읍·남원·익산 등 대규모 민중이 참여한 동학농민운동의 고장”이라며 “이곳은 동학(천도교)이 활발히 퍼진 곳이자 호남의 곡창지대로서 임진왜란 후 일본뿐 아니라 탐관오리에게 늘 수탈의 대상지였다”고 말했다.

주요 인물로는 김영원과 박준승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둘 다 임실 출신 천도교인으로 동학운동과 3.1운동에 관여했던 인물”이라며 “김영원은 삼화 학교 등 후진 양성과 임실 장날, 독립 만세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됐으며 독립선언서 등을 게시했던 인물로 체포돼 옥고 중 순국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준승도 동학·3.1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1891년에 동학에 입도해 1897년 접도가 됐고, 1912년엔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을 역임하다 민족대표 33인으로, 손병희로부터 권유를 받고 독립운동에 함께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종교인이 많은 이유에 대해선 “당시 학교와 교회 외엔 집회의 자유가 없었다. 종교 사상 외에도 잘 갖춰진 기독교, 불교 등 종교 조직을 통해 급속도로 이런 운동이 퍼질 수 있었다”고 답했다.

김봉곤 교수는 “동학 정신과 3.1정신은 인도 간디의 비폭력평화주의 정신과 닮았다”며 “동학운동의 희생자는 30만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소 3만명~5만명은 정부가 끌어들인 일본군에게 몽둥이·칼·무라다 소총으로 처참하게 희생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에 비교해 동학군은 죽창·농기구·소총(구식) 등을 사용했다.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3.1운동도 헌병 경찰에게 탄압당한 후 무기를 들었지만 가혹한 헌병 경찰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자위권적’ 차원에서 곤봉·각목·나무창 등 원시적 무기를 소지하거나 자진해서 투석하는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또 “혁명에 참여한 지도자와 민중들은 동학의 영향을 받아 인내천(人乃天)·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즉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을 하늘 섬기듯 한다’는 동학의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동학운동은 비록 일본의 침략·탄압 때문에 실패로 끝났지만, 동학 정신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반(反)침략주의 정신은 3.1운동, 5.18, 더 나아가 촛불혁명까지 한국 근현대 민족·민중운동의 원류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 즈음 창시된 원불교의 탄생배경과 소태산(小太山) 박중빈의 일화도 잠시 소개했다.

김 교수는 “박중빈은 유불선 3교와 성서 등을 두루 섭렵한 인물로 5년여의 고행의 침잠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전남 영광에서 교도들의 식량 자급자족과 생활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 방언(제방) 공사를 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저것은 개벽을 재촉하는 상두소리다. 우리도 때가 왔으니 바쁘다. 어서 제방을 쌓고 기도를 드리자’고 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후일, 한가히 기도만 올리면 되겠냐고 묻자 소태산은 ‘태평양의 물고기를 어떻게 몽둥이로 잡느냐, 물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을 짜야지’라고 했다. 그물은 곧 정신의 개벽(開闢), 물질, 문화의 개벽(開闢)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공사를 마친 소태산은 9인 제자와 함께 1919년 3월에 혈인 기도를 시작해 최후의 기도일인 8월 21일 기도를 마친 후 청수를 도실 중앙에 놓고 제자들과 모였다. 그리고 칼을 청수(淸水)상 위에 놓고 ‘너희가 나라와 동포를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사심이 없느냐’고 묻자 제자들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며 “그 마음을 확인한 후 사무여한(死無餘恨)이라 적힌 종이에 백지(指: 인주를 묻히지 않은 손가락)장을 찍고 결사의 뜻을 다지자 혈인(血印)이 올라오는 이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원불교 창립 정신인 사무여한(死無餘恨)과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며 “자신은 물론 이웃과 나라를 위해 정신개벽, 물질 개벽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원불교의 정신 또한 ‘자유와 평등’ ‘평화와 독립’을 외친 독립운동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천도교나 다른 종교보다 원불교와 3.1운동 역사에 관한 연구가 다소 부진하고,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어 아쉽다”며 “최근 원불교 사상연구원에서 박맹수 원광대학교 총장을 중심으로 원불교(불법연구회) 역시 일제로부터 감시·탄압받은 가운데 민족 지향성을 갖고 독립운동에 동참했다는 흔적이 있고, 이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천지일보 전북=이영지 기자] 원불교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원불교 초창 당시에 행한 기도에서 백지 혈인의 이적이 나타난 일(법인성사)을 재현한 모습 ⓒ천지일보 2019.3.1
[천지일보 전북=이영지 기자] 원불교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원불교 초창 당시에 행한 기도에서 백지 혈인의 이적이 나타난 일(법인성사)을 재현한 모습 ⓒ천지일보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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