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수형기록 카드.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18.12.31
유관순 수형기록 카드.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18.12.31

‘1월 한 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 유관순 영정 등 7점 전시’

[천지일보 천안=박주환 기자]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이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유관순을 2019년 기해년(己亥年)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독립기념관은 2019년 1월 1~31일 한 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 유관순 영정 등 7점을 전시한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유관순은 1902년 충남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개신교로 개종한 일가친척과 계몽운동에 힘쓰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중시했다. 1915년 4월 선교사의 주선으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게 됐다.

1918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 속에서 국내외 항일운동 세력들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해갔다. 서울의 학생들도 학교별 대표를 선임해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했는데, 유관순도 학당 내 비밀결사조직 이문회를 통해 상황을 접하고 이화학당 학생 시위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1919년 3월 1일 유관순과 학생 시위대는 만세 운동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점차 많은 학생이 참여하자 만세 운동의 규모는 커졌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학생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3월 15일 임시휴교령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은 고향에서의 만세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들고 천안으로 향했다. 우선은 동네 어른들께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알렸고, 부친의 도움으로 지역 유지들과 대규모 만세 운동을 논의할 수 있었다.

4월 1일 유관순은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한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3000여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시위 운동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을 비롯한 19명이 목숨을 잃고 유관순과 시위 주동자들은 천안헌병대로 압송됐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유관순은 갖은 고문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옥중 만세를 불렀으나,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19살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유관순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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