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김덕수

요즘같이 예절이 절실할 때도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임은 곧 우리의 존재를 있게 해주는 이 사회나 공동체에 대한 배려이자 최소한의 예의규범입니다. 배려는 지각있는 사람의 기본소양이기도 합니다.

한가위 약 보름 전에 순천 송광사에서 사미계를 갓 받은 스님 한 분과 백담사 만행을 다녀올 기회가 생겼답니다. 유난히도 올해엔 비가 많이 그리고 자주 왔지요. 백담사 초입 용대마을에서 저녁 공양을 하고 또 다른 스님과 동행해 택시를 탔습니다.

중도에 시작한 비가 밤새 줄기차게 왔어요. 절에 밤늦게 도착해 먼저 부산에서 오신 불자분들과 합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인솔 하에 부부가 함께 오신 경우도 있고 남녀분들이 같이 오셔서 주로 여자분들은 저녁공양 후에도 법당에 가셔서 정진하시고 남자분들은 술 드시고 담배 피우시는 것이 장소만 절로 옮겼지 거의 대부분의 생활이 세속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더군요.

우연히 제가 배정받은 방의 처사님 내외와 잠시 대화할 시간이 있었어요. 그 분들은 내외가 다 세속의 때에 덜 찌든 순수한 분들로 다가왔어요. 그 보살님 말씀이 절에 오래 다니신 분들일수록 대부분 이기적이고 성격이 강해 초심자들은 늘 뒷전이라는 푸념과 불평을 늘어놓으시더군요.

제가 생각해도 요즘의 불자들은 상대와 초심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갈수록 아쉬워짐을 역시 통감합니다. 언제나 초심자로, 초발심으로 돌아가야 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 분들이 당초에는 백담사에서 일박하고 봉정암으로 올라가 기도하기로 일정을 잡은 모양인데 밤새 비가 내리고 다음날에도 그칠 줄 모르니 동해안 낙산사로 여정을 바꾸었어요.

그날 밤에도 그 부산 보살님이 대화중에 “기도는 어디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라고 질문하셨어요. 참으로 거의 모든 불자들로부터 한결같이 받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야기 합니다. 집을, 가정을 부처님의 법당으로 만드십시오. 그리고 꼭 절에 가서만 정진하시려고 하지 말고 일상생활이 모두 정진의 삶이 되도록 매 순간 순간을 정성스럽게 살아가십시오라고.

이 평범한 말이 진리인데도 요즘의 불자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 모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도하는 스님네나 배우려는 신도들이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것을 말씀하시고 또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중용(中庸) 제일장에 ‘중자(中者)는 불편불의(不偏不倚)하며 무과불급지명(無過不及之名)이라’ 합니다. ‘용(庸)은 평상야(平常也)’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중도(中道)를 말씀하셨는데 왜 뜬금없이 유서(儒書)의 중용을 이야기하냐고 하실 수 있어요.

저는 먼저 중용을 알고 중도를 이해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종교 간의 벽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각 종교에서 설파하는 진리는 같은 가치를 이야기하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논해야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종에게 있어 하늘은 혹 표현방법과 발음이 다를지언정 같은 의미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 종교 저 종교가 각기 다른 하늘을 이야기하면 혼란만 가중되고 종교 간의 장벽이 두터워져 서로 간에 갈등만 조장할 따름입니다.

용은 평상야라. 평이하고 떳떳한 것이 ‘용’이라고 했어요. 생활하는 데 정도에 맞게 하는 것이 떳떳한 것입니다. 평이하고 떳떳함 속에 진리가 있지 특별하고 괴이한 짓과 행동은 진리가 아닙니다. “꼭 어디 절에 가서 기도해야 부처님 가피(加被)를 받는다”거나 봉정암이나 보리암에 가서 철야기도를 해야 아들이 대학 시험에 합격한다는 등 우리 현실에는 참으로 특별한 코스가 늘 수식어로 따라 붙습니다.

불자님네들, 이제는 평상심에서 도를 갈구해야 합니다. 특별한 코스는 반드시 위험하고 특별한 대가가 뒤따르는 법입니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알차고 실속있게 사는 삶에서 복은 쌓여 갑니다. 내가 춥고 배고픈 줄 알면 남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면 됩니다. 그 가운데 자연히 질서는 바르게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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