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에  안경이  들려  있다.  당시  기생은  패션리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공: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오른손에 안경이 들려 있다. 당시 기생은 패션리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공: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0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평양’하면 ‘냉면’이라는 말이 떠오르듯, 그리 멀지 않던 과거에는 ‘평양’하면 ‘기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기생 혹은 기녀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도 만연하지만, 당시 기생은 춤과 노래뿐 아니라 시서화(詩書畵)에 능해 고관대작이나 상류층 인사들과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거문고와 가야금 등 악기를 다루는 것에도 능해, 교양 정도에 따라 명기(名技)로 알려진 초일류 기생들도 많았다. 또한 기생을 ‘말을 할 줄 아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그만큼 아름다움과 재능을 겸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기생’이라고 하면 ‘평양’을 떠올렸을까. 당시 평양에는 기생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전문기관인 ‘평양기생학교’가 있어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평양기생학교의 수업은 3년 동안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어졌으며, 한문과 국어, 음악을 비롯해 승무와 검무 등의 춤을 가르쳤다. 이외에도 거문고와 가야금 같은 악기를 가르쳤으며, 무엇보다 애국심 고취와 윤리교육을 중시했다.

이들은 1907~1908년 사이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해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인 ‘국채보상운동’과 일본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전개한 ‘물산장려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든 이들도 있었다.

서울 출생으로 수원의 기생이었던 독립운동가 김향화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진주에서는 ‘기생독립단’이라고 하는 기생조합 소속 기녀들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평양에서도 기생들이 만세시위를 주창하며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기생에 대한 편견의 굴레 속에서도 이들은 나라와 민족이 어려울 때마다 힘을 모아 국난을 극복하려 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승하하기 전 조선을 찾은 한 일본인 사업가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조선의 기녀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고 한다.

“조선의 기녀들은 움직이는 안방독립운동가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움직였던 기생들의 활약은 당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모든 민중들의 한결 같은 마음,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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