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曺晩植, 1883.2.1~1950.10.18]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본관: 창녕(昌寧)    
호: 고당(古堂)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평남 강서(江西)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70)

“애국 애족하는 길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내가 죽은 뒤에 비문은 쓰지 마라.

그 대신 큰 눈을 두 개 새겨다오. 한 눈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고, 한 눈으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지켜보리라”

고당 조만식은 1905년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 1908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던 중 인도의 독립운동가 M.K.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는다.

1 기독교와의 첫 만남, 호기심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진 1882년 12월 24일(양력 1883년 2월 1일) 평양에서 한 남아(男兒)가 태어난다. 한국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처음 개방한 첫 해인 이 시기에 한국 교회의 대들보이자 민족의 독립을 위해 세상과 맞서 싸운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고당 조만식 장로가 태어났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고당은 어린시절부터 자연히 미국 선교사와의 만남이 자연스러웠고 쉽게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다.

열 살이 넘었을 무렵부터 기독교를 접하게 된 고당은 훗날 그 때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서양인을 처음으로 본 것은 열한 두 살 되었을 때라고 생각되며, 보았던 곳은 대동문 안 한석진 목사 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목사의 맏이 갑손이는 내 글동무였는데 이 집에 서양인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놀 겸 구경 겸 자주 가서 서양인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양귀자로 불렀었지요. 이 양귀자가 마포 삼열목사였는지 혹 다른 목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커먼 옷, 커다란 눈, 높은 코, 참말로 모든 것이 놀랍고 이상스러운 눈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양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약을 먹여서 미치게 하는데, 약 먹이는 방법은, 모르는 사이에 얼른 입가에 슬쩍 스치는 것인데, 그렇면 곧 미쳐서 양귀자가 하라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말 때문에 자주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때마다, 양귀자 냄새가 나는 책자를 줍디다.

지금 생각하니 이 책자는 한문으로 번역해 인쇄한 쪽 복음 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기타 부속서류인 인가귀도, 덕혜입문 등과 같은 조그마한 전도서류였는데 양지 냄새와 인쇄 묵 냄새들이 양귀자 냄새로 굳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냄새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인가 하여 좀 맡아보고는 내어버리던 것이 어제와 같은데, 벌써 40여 년 전 옛날 묵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당과 기독교의 첫 만남은 호기심에 가득 찬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2 지도자의 지도자

앞선 사람들, 흔히들 선구자, 선각자, 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고당 조만식 장로를 들 수 있다.

고당은 오산학교의 선생이었고 교장이었다. 그가 학교에서 일하던 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 이름만으로 한국사와 한국기독교역사에 기리 남을 인물들이다.

주기철 목사와 한경직 목사 그리고 함석현 목사는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또 사회적으로는 백인제와 주기용, 김항복과 김홍일 등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독립운동의 주역들도 스승 조만식 장로에게서 나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민족의 지도자들이 한 스승 아래서 많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일까?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다’라는 옛말이 있다.

조만식 장로가 오산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한 것을 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조만식 장로에게 지도를 받았던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나 학생들과 함께 아침체조를 하고, 학생들 틈에 끼어 구보도 함께 했다.

사환이 없던 시절 고당은 청소는 물론 난로를 피우기 위해 장작을 패는 일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기도회를 주관해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는 등 학생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도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민족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고 설교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그의 믿음과 솔선수범하는 생활은 고당이 오산에 온지 1년이 못 넘어 학교를 놀랍게 변화시켰다. 교직원과 졸업생은 다시 단결을 찾았고 학생들 사이에는 검소함이 번져나갔으며 학교와 교회에는 새로운 신앙으로 불타올랐다.

3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숭실학교 입학

고당은 상업에 종사하다 실패한 후 홧김에 놀음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정교라는 청년이 고당을 찾아왔고 그를 만난 뒤 고당은 인생에 있어서 일생일대의 전환을 맞게 된다. 술과 놀음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던 고당에게 청년 한정교는 그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와 같은 말을 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는 줄 아나? 지금 우리나라는 점점 더 형편없이 되어간다. 사방에 강한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일본은 지금 우리나라를 자기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온갖 장난을 다 한다.

그런데 너 같이 한문 공부도 많이 하고 머리도 좋고 재산도 그만하면 살아갈 만 한데, 너 같은 사람이 이런 생활을 해 가지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바로 이 말이 고당의 마음을 찌르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고당의 질문에 청년은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고당과 기독교간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정신이 든 조만식은 예수를 믿고 숭실학교에 입학할 결심한다. 그는 세상 술 친구들을 불러 마지막으로 이별주를 마시고 그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자네들 다 좋은 친구들인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난 예수 믿기로 작정했네. 이제부터 나는 숭실학교에 가서 공부하기로 했네. 나라를 살리기 위함일세. 앞으로 자네들, 내 친구가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하네.”

그리고는 날이 밝자 아직 술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상태로 숭실학교를 찾아간다. 당시 설립자이며 교장이던 배위량 박사를 만나 입학을 요구했다. 배위량(Baird) 박사는 ‘웬 주정뱅이가 와서 그러는 고’ 생각하며 ‘공부는 무엇 하려 하나’라고 말하며 입학할 자격이 없음을 표했다.
그러나 술 냄새가 풍기는 조만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배위량 박사의 마음을 움직였다.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

이렇게 해서 조만식은 1905년 23살의 나이로 숭실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많은 기쁨을 맛본 그는 이 새롭고 놀라운 세계를 혼자만 알고 있기가 아까웠다.

훗날 그는 이 때를 “공부하고 기도하고 또 전도하고, 학우들끼리 즐겁게 지낼 수 있고, 불규칙하지만 운동도 하고 이렇게 학우들은 정말 친밀히 사귀며 지냈다. 여기는 반목도 질투고 시기도 파벌도 너와 나도 없는 참 사귐이었으며 참 낙원이었다.”

4 민족대표 33인, 민족의 평화를 위해 싸우다

고당 조만식 장로는 신앙생활뿐 아니라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을 정도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열정을 쏟았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조만식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4월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물론 처음 유학길에 오른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경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던 중, 접하게 된 간디의 자서전은 그를 나라를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애국주의자·평화주의자로 만들었다.

1919년 오산학교의 교장직을 사직하고 3·1운동에 참가했다 체포된 후, 평양감옥에 1년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1923년에는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만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했으나 이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됐다.

고당 조만식 장로는 1932년 조선일보사의 사장이 되어 민족의 소리를 내기 위한 언론의 장달에 공헌하고 무저항민족주의운동을 지도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했으며 소련군정청의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취임 권유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越南)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했다.

해방 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조선민족주의운동의 3대 거목으로 불린 조만식은 북한 민족주의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서북 지역에는 민족주의세력 가운데서도 기독교도들의 기반이 매우 강했으며 기독교 장로인 조만식은 해방과 함께 자연스럽게 북한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건국문제를 둘러싼 이견 대립으로 조만식 측과 공산 측의 관계가 악화되게 된다.

그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0년 10월 중순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게 된 북한지도부는 조만식을 총살한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저항주의와 평화주의를 외치던 고당 조만식 장로는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의 활발한 추진력과 지도력은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다.

더불어 그가 몸담았던 산정현교회 또한 역사의 산 증인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서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산정현교회 [山亭峴敎會]

1905년 평양 계동에 설립된 장로교회로 교회 차원으로 3·1운동에 가담하고 신사참배 반대했다. 산정현교회는 평양지역 모교회인 장대현교회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교회로 고당 조만식 장로가 몸담았던 교회이기도 하다.

105인 사건과 관련되어 활동하던 강규찬 목사와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주기철 목사 등 민족의 독립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순교자들이 많았다.

8.15광복 후 출옥한 성도들이 모여 한국 교회 재건원칙을 마련, 이 교회 출신으로 있던 성도가 남한으로 피난 와서 곳곳에 산정현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

1920년대에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항거하여 벌였던 범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으로 3.1 운동 후 개화한 근대 지식인층 및 대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물자 아껴쓰기 및 우리 산업 경제를 육성시키자는 기치 아래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앞장서 벌여 나간 운동이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탄압은 날로 심해지고, 1923∼1924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침투, 확산되면서 민족정신 말살정책이 점차로 노골화하여 갔다.

이때 3·1운동에 참가하였던 민족 지도자들이 민족운동의 부흥을 위해서는 우리 힘의 배양이 절실함을 주장하면서 벌인 운동이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시발이었다.

1923년 1월 9일 20여 개의 민족단체 대표 160여 명이 서울에 모여 발기준비대회를 가진 데 이어 2월 16일에 3000여 명의 회원들이 참가하여 발족시킨 모임이 이 운동의 중추적인 기구가 되었다.

이때의 기본 실행 요강을 살펴보면,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소금-과일-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우리 것을 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이 세 가지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 운동은 평양에서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한 민족 지도자들과 자작회(自作會)가 주축이 되어 1920년 7월 20일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인대회를 가진 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평양에서 비롯된 토산품 애용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며 경제적 착취를 당해오던 시민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 소비조합을 비롯한 민족기업 등의 설립을 촉진시켰으며, 이 움직임이 인천을 거쳐 서울에서의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서울에서 조직된 토산품애용부인회와 경남 의령(宜寧)에서 시작된 토산품장려 및 금연실천운동, 그 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금주단연운동, 토산품 애용운동은 공창(公娼)-포주들까지도 동참 협력한 거족적 애국운동으로 확대되어 갔으나, 이에 겁을 먹은 일제의 분열공작과 탄압으로 인하여 뜻을 크게 펴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었다.

참조:
기광서, 「해방 후 조만식의 활동과 운명」
강변교회 김명혁 목사,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조만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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