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를 아는가. 청렴결백한 공직자를 의미하며, 오늘날 청백리상을 수여할 정도로 유명하다. 청백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200여명의 청백리가 배출됐다. 도덕·효·인 등의 덕목을 겸비, 이상인 관직자인 조선의 청백리를 알아보자.

구치관 선생 글씨 (출처: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9
구치관 선생 글씨 (출처: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1.9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 전기의 문신인 구치관(1406~1470)선생은 대표적인 청백리이다.

할아버지는 개성 부윤 구성로(具成老)이고 아버지는 목사 구양(具楊)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세종11년(1429)에는 생원시에 합격했다. 세종16년(1434)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가 됐다가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

단종1년(1453) 계유정난 직후 이징옥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금부지사로 수양대군의 명으로 함경도에 파견돼 경성부사 이경유를 참살하고 반란군의 무리를 제거한 공으로 보공대호군(保功大護軍)에 승진됐다.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불러들여 “경(卿)을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얼마 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돼 좌승지에 이르렀다. 세조가 즉위(1455)하자 좌부승지가 됐고 이후 이조참판으로 승진했다가 병조로 옮겼다.

얼마 후 평안도 절도사로 제수된다. 이때 임금이 명하기를 “나는 경을 측근에서 멀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다만 병사의 무거움을 나누어 어쩔 수 없이 다시 경을 번거롭게 만들었으니 경이 먼 길을 떠난 뒤에는 내가 다시 평안도 지방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 정헌대부 이조판서(내무와 인사 담당)에 임명되자 사대부가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바른 사람이 관리 선발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공평하고 바른 도리가 시행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 우의정을 거쳐 세조 12년(1466) 영의정이 됐다. 구치관 선생은 용모와 행동이 엄숙하고 확연하게 지키는 것이 있어서 이익과 세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몸가짐을 청백하고 검소하게 했다. 또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한 인물이었다.

구치관 선생에 관한 재밌는 일화도 전해진다. 조선시대의 인물들에 얽힌 일화를 모은 책인 ‘대동기문’에 따르면, 세조때 신숙주가 이미 영의정으로 있고 구치관을 새로 우의정으로 삼은 뒤에 두 정승을 불렀다.

임금은 “오늘 물을 것이 있으니 경들이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지만 대답을 잘하지 못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하고는 “신정승”하고 불렀다. 이에 신숙주가 얼른 대답을 하니 세조가 “나는 신(新)정승을 불렀는데 경이 잘못 대답하였도다”하고는 큰 잔에 벌주(罰酒)를 내렸다.

또 “구정승”하니 구치관이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구(舊)정승을 불렀는데 경이 잘못 대답하였도다”하고는 또 큰 잔에 벌주를 내리었다. 이렇게 종일 벌주를 마시고는 모두 크게 취한 뒤 자리를 끝냈다.

도움말: 문학박사 조성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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