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민이 청계천 첫 물줄기 ‘백운동천’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5
한 시민이 청계천 첫 물줄기 ‘백운동천’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5

궁묘, 궁실 위치한 왕가의 거주지

천재문인들 문학작품 꽃 피우기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청계천의 첫 물줄기인 ‘백운동천’. 창의문 기슭에서 발원하는 하천으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흐르던 물줄기다. 백운동천은 물길인 동시에 창의문으로 통하는 길로, 많은 이들이 지나치는 곳이었다.

오늘날 청계천은 종로구와 중구를 가로질러 왕십리 방향으로 흐르지만, 자연하천이었던 조선시대까지 물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한강을 만나 빠져나왔다.

◆경복궁 서쪽 백운동과 백운동천

백운동은 조선 5대 명승지의 하나로 백운동천의 서북쪽 일대의 상류부를 일컫는다. 여기서 동(洞)은 행정구역의 동이 아니라 골짜기, 계곡을 의미한다. 백운동천은 창의문 기슭에서 발원하는 하천이다. 청계천의 도성 내 지류 중 가장 길어 청계천의 원류로 간주된다. 준천사실에는 ‘백운동래자’로, 한경지략에는 ‘백운동천수’로 표시돼 있다. 현재는 계곡수가 유입되는 상류의 일부를 제외하고 완전히 복개돼 도로가 됐지만, 복개 이전의 하천은 현재의 청계광장 위치에서 삼청동천과 합류했다.

백운동천 주변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관아들이 밀집한 행정의 중심지였다. 궁묘와 궁실들이 위치한 왕가의 거주지였다. 적장자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왕위에 오른 세종과 세조, 영조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 자라났다. 왕족으로 인생을 영위한 안평대군,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는 왕이 되기 전에 생활했던 잠저(潛邸)들과 여러 왕자들의 생활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겸재 정선의 백운동천 그림 (제공:청계천박물관)ⓒ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5
겸재 정선의 백운동천 그림 (제공:청계천박물관)ⓒ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5

◆변화하는 백운동 주변

조선후기 한양에는 인구집중과 남벌, 화전의 증가, 온돌의 확대 같은 다양한 요인으로 사산의 황폐화가 상당히 진행됐다. 백운동 일대도 산림이 많이 훼손됐다. 고종실록(1878년 3월 29일자)에는 ‘무지한 백성들이 전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몰래 베는 행동이 날로 심하여 산이 벌거숭이가 되었으니’라고 기록돼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백운동천은 만성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하천에는 무분별하게 오물과 배설물이 버려지는데, 위생문제는 20세기 초 유행한 전염병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천변 양측의 노폭이 좁아 낙상사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 통행과 교통의 문제도 안고 있었다.

도로의 무질서와 불결을 바로 잡은 것은 ‘도시정비사업’의 시작이었다. 이는 도로망의 구축을 말한다. 백운동천의 경우, 복개와 도로구축과 같은 물리적인 변화는 총독부신청사의 경복궁 이전이 동기가 됐다. 당시 광화문 앞 영추문, 동의동에서 효자동까지의 전찻길의 확장으로 그 일대의 도로가 정비됐다.

청계천의 복개는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1961년 12월 동대문에서 오간수교까지 복개가 완료됐다. 이후에도 복개 구간은 계속 연장돼 1970년 초 마장동 부근에서 끝을 맺었다. 백운동천 유역은 1966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고시 1094호에 의거 효자로로 이름 붙여졌다. 1978년 내자동에서 청운초등학교까지 복개됐다. 이로써 기존의 물길은 옛 지도 속에 남게됐다.

경복궁 서쪽에 살던 문인들의 작품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5
경복궁 서쪽에 살던 문인들의 작품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25

◆서쪽에 핀 천재문인들

교통과 학교라는 도시 인프라 구축은 서쪽마을에 많은 인재들을 불러모았다. 시인이자 작가인 이상의 집에서 몇 발자국 되지 않는 곳에는 시인 모윤숙이 거주했다. 소설가 김송의 집에는 윤동주가 하숙했다.

김송은 1900년대 중반 소설에 주력했는데 지방색이 짙고 소시민의 생활묘사가 특징적이었다. 광복 후에는 극심한 이념적 갈등 상황 속에서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시인 나혜석은 진명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졸업생 최우등의 영예를 안은 바 있다. 특히 현진건은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서촌에 거주했는데,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식민지 시대의 현실대응 문제를 단편적인 기교로 양식화해 문학사적 위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이렇듯 당시 이름만 들어도 내로라하는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천재문인들이 이곳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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