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따뜻함의 시초, 목면시배유지를 가다 '안녕, 목화야'
[역사기획] 따뜻함의 시초, 목면시배유지를 가다 '안녕, 목화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지TV=서효심 기자]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며 입으며 새벽녘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나라 의복문화에 큰 변화를 준 목화를 만나기 위해서다.

진주역까지는 열차로 3시간 반 거리. 목화가 있는 목면시배유지까지는 차로 30분은 더 가야 한다.

멀찌감치 목화밭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 목화야

[변화의 시작, 목면시배유지를 가다]

꽃이 피었다 지면 푸른 타래가 맺힌다.

타래가 익으면 가을날 하얀 솜꽃이 다시금 피어난다.

피어난 솜을 따다가 씨앗을 골라내면 부드럽고 포근한 솜이 된다.

이것이 바로, 목화솜이다.

작은 목화씨 한 톨은 고려와 조선의 국가 경제를 바꾼 일대 혁명이었다.

600여년 전 작은 목화씨 한 톨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엄청나게 바뀌게 되는데

바로 삼우당 문익점에서 비론된다.

1963년 사적 제108호로 지정된 목면시배유지. 이곳이 바로 변화의 시작점이다.

900평정도 되는 목화밭과 함께 목화재배 역사와 의생활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옆에는 삼우당 문익점의 덕을 기리는 부민각(富民閣)이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을 바꾼 한 톨의 씨앗]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10개의 목화 씨.

이를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반으로 나눠 각각 재배했지만 하나의 씨에서만 싹을 틔워냈다.

천신만고 끝에 피어난 목화 꽃.

이것이 전파되는 데에는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과 그것을 제배하고 보급했던 정천익의 노력에 담겨있다.

목화씨로 생산된 목면은 많은 사람의 생활영역을 넓히고 삶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조선 초기에 대중화된 무명은 조선 3대 기관 산업으로 광물, 소금과 함께 자리 잡았다.

화폐로도 가치를 인정받아 한중일 무역구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선시대 막대한 영향을 미친 목화씨.

목화가 들어오기전 우리 조상들은 삼베옷을 입었다.

삼베는 거칠고 보온성이 떨어져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이처럼 목화씨 한 톨은 백성들 뿐 아니라 조선경제 발전과 의류혁신에 큰 획을 그었다

[무명의 노래]

삼베는 모든 과정이 수공업인 반면 목화는 씨아와 물레 등의 기구를 활용해 만들어진다.

부민각(富民閣) 대청마루에서 재현된 무명베짜기.

보존회 어르신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먼저 따온 솜을 가져와 씨앗을 제거하는 씨아기.

씨를 뺀 솜에 대나무로 만든 활을 이용해 솜을 타는 활타기.

실을 뽑아내기 위해 수수깡이나 참대로 솜을 둥글게 말아주는 고치말기

고치말기를 고정시켜 물레를 돌려가며 실뽑기.

날실이 될 실들을 가지런히 고르는 무명날기.

베를 짤 때 엉킴을 막고 아래에 불을 지펴 날실에 풀을 먹이는 무명매기.

무명의 완성을 위한 베 짜기.

고즈넉한 한옥 마루에서 베 짜기 재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수백 년 전 과거로 돌아간 듯 한 묘한 기분까지 든다.

 

누군가 그랬다. 요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거저 얻어지는 게 많다고. 하지만 그 시초는 그리 쉽지 않았다고.

오랜 시간과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무명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진다.

 

작은 목화 씨 한 톨이 가져야 했던 막중한 시대적 사명.

한 시대의 경제를 바꾸고 새로운 삶의 혁명을 가져온 목화씨.

그 따뜻함의 시초가 된 문익점의 애민정신.

때문에 우리는 추운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고 손쉽게 따뜻한 옷을 찾아 입을 수 있는 오늘을 살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목화씨 한 톨의 소중함과

백성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문익점의 애민정신을 되새겨

희미해져 가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널리 알려야 할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7.12.1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