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멋진 태극전사, 열광한 붉은악마 모두가 승자였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세계 랭킹 47위의 대한민국이 13위의 그리스에 2-0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던 순간 뜨거운 감동의 물결이 출렁였다.

전반 초반 선제골을 넣은 이정수와 후반 쐐기골을 터뜨린 박지성을 비롯한 국가대표 선수들과 허정무 감독 등 코칭스태프들은 경기 후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으며 한국의 승리를 기대한 5천만 붉은악마들은 가슴 벅찬 환희를 맛보았다.

뜨거운 대지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밤, 과천의 모 음식점에서 부부동반으로 붉은 티셔츠를 입고 생맥주를 곁들이며 대한민국과 그리스전을 지켜보았던 필자를 비롯한 일행들은 한국의 승리를 확인하고 환희의 술잔을 높이 들며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쳤다. “축구대표 선수님들! 행복하게 해줘서 고맙습니다”라며 빨간색 바지까지 입고 나온 중년 아주머니가 애교섞인 멘트를 날려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막연히 이기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완벽한 승리를 거둘 줄은 미처 몰랐다. 1골차로 이기기도 힘든 월드컵에서 실점을 전혀 내주지 않고 2골차로 승리한 성적표를 거머쥔 대표선수들도 국민들도 현실인지 꿈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앞에 펼쳐진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한국축구는 엄청나게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스태미너와 속도, 열정적이고 창의력이 넘친 개인기, 숨소리도 고르며 서로의 호흡을 맞출 줄 아는 조직력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축구에서 중앙수비수가 골을 넣는다는것은 아주 힘든 일인데 이정수는 세트플레이에 가세하며 여유있는 골을 기록했고 믿음직한 박지성은 무서운 돌파력으로 30여m를 치고 들어가 환상적인 골을 엮어냈다. 예전에 골결정력 부족에 허덕이고 신장이 좋은 유럽팀에 고전하던 그런 대한민국 축구팀이 아니었다.

이러한 한국축구의 놀라운 성장을 이번 대회 시작 전 세계축구계는 이미 주목했다. 유럽의 축구전문가들은 남아공월드컵에서 한국의 전력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상했다. 미국 스포츠 전문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대회 직전 남아공월드컵 특집기사에서 한국의 16강 전망을 내놓았다.

SI는 영국의 축구전문가 조너선 윌슨이 기고한 전망에서 예선 B조에서 한국이 아르헨티나와 함께 16강에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피라밋: 영국축구의 해부’라는 축구전문서적을 저술하기도 한 윌슨은 한국축구에 대해 “체력과 전반적인 페이스가 본 궤도에 올랐다”면서 “한국이 그리스전에서 이기면 16강 진출이 손쉬울 것”이라고 평가했다.

윌슨은 한국이 그리스전에서 승리한 뒤 예선 마지막 상대로 만나게 될 나이지리아는 아르헨티나에 이어 그리스에게도 져 예선탈락이 확정된 상태가 돼 아주 손쉬운 경기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마치 사전 시나리오를 쓴 듯 윌슨의 예상은 이미 착착 현실로 진행돼고 있다.

이번 남아공월드컵은 마치 2002년 한ㆍ일월드컵을 다시 보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당시 조 예선 첫 상대 폴란드전에서 황선홍, 유상철의 연속골로 FIFA 랭킹에서 크게 앞서있던 폴란드를 2-0으로 완파, 폭발적인 스타트를 끊었다.

미국에 1-1로 비기고, 강호 포르투갈을 1-0으로 제치고 사상 첫 16강에 진출한 대한민국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당시 모 스포츠 신문 체육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필자는 16강에 오를 때만 해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스페인과의 8강전서 연전연승하자  ‘이건 아닌데’ 하고 반신반의하며 기뻐했었다.

당시의 추억이 다시 아른거린다. 출국 전 허정무 감독이 “큰일을 내고 돌아오겠다”고 결의를 밝혔듯이 이번 남아공월드컵에서 8년 전 한ㆍ일 월드컵과 같이 뭔가 놀라운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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