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과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 오래전부터 시장은 사람들의 삶과 뗄 수 없는 한 영역으로 존재해 왔다. 또 급변하는 현대 속에서도 시장은 제 자리를 지키며 오가는 이들에게 정을 나눠주고 있다. 이와 관련, 선조들의 삶이 담긴 전통시장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오늘날 시장의 가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 서울약령시장에 진열돼 있는 약재들ⓒ천지일보(뉴스천지)

우리나라 최대 한약재 전문 시장
조선시대, 보제원 주위로 상인 모여
해방 후, 한약재 전문 시장으로 형성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곳곳에서 나는 쌉싸래한 한약 냄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한약재에 없던 기운도 솟는 듯하다. 서울 동대문구 약령중앙로에는 오늘날 약재를 파는 약령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전국 한약재의 70%가 유통되는 최대 약재 전문 시장이다. 제기동과 용두동 일대에 걸쳐 많은 약재 상가와 한의원, 한약국이 있어 약재시장의 명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장 안에는 인삼, 오미자, 대추 등 다양한 한약재가 즐비해있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보제원’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

‘약령’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효종 연간부터 개설 돼 약재를 정기적으로 사고팔던 시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약령시장은 서울 뿐 아니라 대구, 제천 등 전국에 분포해 있다. 그중 서울약령시장의 규모가 가장 크다.

서울약령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조선시대에 관리나 여행자의 숙소이자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 는 보제원(普濟院)이 있었다. 보제원 주변으로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한약재를 가져와 파는 약재 상인 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시장이 형성됐다. 이것이 서울약령시장의 기원이다.

▲ 보제원터 비석. ⓒ천지일보(뉴스천지)

오늘날에는 ‘보제원터’ 비석이 옛 위치를 기억해줄 뿐이다. 비석에는 ‘1393~1895년 여행자의 무료숙박 과 병자에 약을 주던 곳’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하를 한양 밖에서 가장 멀리 환송하는 장소로 주로 보제원이 나오기도 한다.

왕이 나이든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선물을 주 기도 하는데 주로 보제원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세조실록(세조 9년)에 따르면, 왕세자가 한명회(韓明澮)를 보제원에서 전별(餞別: 잔치를 베풀고 작별함)하니, 서연관·익위사·겸사복 등이 모두 수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종도 보제원에서 기로연을 베풀었다. 또 고종은 1890년(고종 27년) 모셔오는 신주(神主)를 흥인문(興仁門) 밖의 보제원에 나아가 맞이했다. 하지만 시장은 일제강점기에 수난을 겪는다. 당시 보제원 중심으로 문물과 정보 교류가 활발해지자 일제에 의해 시장이 강제로 폐쇄된 것이다.
 

▲ 서울약령시장ⓒ천지일보(뉴스천지)

◆해방 후 약령시장 활성화

해방 후 한약재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전국 각지에 청량리역을 이용해 다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교통의 발달 덕분이다.

1960년 6월에는 경동시장이 개설 허가를 받으면서 한약상이 자연스럽게 경동시장에 터를 잡았다. 그러면서 한약재 전문 시장으로 형성됐다. 이후 한약재를 판매하는 사람들과 한의사들은 보제원이 있던 곳으로 자리를 이전했고, 경동시장 한약 거리는 1970년대 이후 급성장했다.

‘약령시’라는 이름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얻게 됐다. 1995년 6월 1일 서울시로부터 ‘경동약령시(전통한 약시장)’가 지정됐다. 이 해부터 서울약령시 대축제가 시작됐다. 2000년대에 서울약령시는 한방 산업 특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한편 최근에는 서울약령시에 전국 최대 규모의 ‘서울한방진흥센터’가 개관했다. 서울약령시를 한방 문화의 거점이자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하기 위한 취지다. 

▲ 서울약령시장에 진열돼 있는 약재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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