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한탁주(韓侂冑, 1152~1207)는 누대의 권문세가 출신으로 북송의 명신 한기(韓琦)의 5세손이었으며, 그의 질녀는 영종(寧宗)의 황후가 됐다. 게다가 황제를 옹립한 공로까지 겸비하자 그는 위세와 복을 한꺼번에 차지하고 점점 궁정과 조정에서 권세를 떨쳤다. 대권을 손에 넣은 그는 당연히 아부를 일삼는 자들과 연합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주희(朱熹)를 위학(僞學)의 거두로 지목해 물러나게 하고 조정에 자신의 당파를 심었다. 쏟아지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금을 공격해 실지를 회복하면 세상의 인심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AD 1203년 군사적인 준비를 마친 그는 주전파 신기질(辛棄疾)과 섭괄(葉适)을 등용하고, 항금명장 악비(岳飛)를 악왕(鄂王)으로 추봉했다. 진회(秦檜)를 비롯한 주화파는 매국노로 단죄했다. 이 때 금의 장종(章宗)은 아첨꾼 서지국(胥持國)을 신뢰했다. 서지국은 이원비(李元妃)와 결탁해 사리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조정 내부에도 잇속을 쫓는 무리들이 가득했다. 금의 관료사회가 급속히 파괴됐지만, 아직도 정치적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한탁주의 오판이었다. 그는 금이 내부의 혼란과 외부에서 몽고족의 압박으로 지탱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1206년, 한탁주는 충분한 전쟁준비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금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약간의 실지를 회복했지만 금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형세가 갑자기 기울어 송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어떤 문인은 한탁주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백 년 동안 양성했던 병사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백 년 동안 갈고 닦았던 무기도 하루아침에 흩어지고 말았다. 세상을 뒤덮는 공로도 하루아침에 공염불이 되고 말았으니, 백 년 동안 중원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로써 한탁주는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주화파는 출병에 반대했었다. 그러나 예부시랑 사미원(史彌遠)이 한탁주의 야망을 꺾으려면 모략을 사용해야 한다고 판단해 출병에 찬성했다. 한탁주의 권세가 커질수록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탁주가 전쟁에서 패하자 금은 전쟁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압박했다. 사미원은 외부의 힘을 이용할 기회를 잡았다. 사미원은 영왕(榮王) 조순(趙詢)에게 주청을 올리도록 권유하고, 양황후를 통해 영종을 설득해 마침내 밀지를 받아냈다. 이들의 모략에 대비하지 못한 한탁주는 대전으로 들어가다가 미리 숨겨놓은 복병에게 살해당했다. 한탁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음에도 주변에 사당을 만들지는 않았다.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던 대부분의 무리들은 한탁주가 죽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의 압력이 강화되자 한탁주를 위해 나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사미원은 가볍게 한탁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그의 수급을 금으로 보내면서 새로운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역사는 사미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탁주를 죽이고 17년 동안이나 재상이 되어 영종을 모셨다. 영종이 붕어하자 제왕(濟王)을 폐했으나 그것은 영종의 뜻이 아니었다. 이종(理宗)을 옹립해 다시 9년 동안 홀로 재상의 자리를 지키며 권력을 휘둘렀지만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자손들에게 은총이 더욱 넘쳤으며, 비석을 세우고 ‘공충익운(公忠翊運), 정책원훈(政策元勛)’이라는 제호를 머리글로 새기게 했다. 무려 26년 동안이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했다니 사미원이야말로 대단한 능력의 사나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그는 교언영색으로 황제를 사로잡았으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적절히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능력은 있었지만, 원대한 정치적 포부는 없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 군자의 표상이라면 한탁주나 사미원은 군자와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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