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시 서구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세워진 높이 39미터의 ‘학생독립운동기념탑’. ⓒ천지일보(뉴스천지)

1929년 11월 3일… 오늘 88주년 기념일
일본인학생의 조선 여학생 희롱사건 발단
학생항일독립운동 불씨 전세계로 퍼져
광주시민도 잘 몰라, SNS홍보 등 절실

[천지일보 광주=지역특별팀] “광주학생독립운동이요? 모르겠어요. 처음 들어봐요. 3.1운동은 아는데.”

11월 3일은 88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다. 시작은 전라도 나주역에서 일본 남학생들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데서 발단이 됐다. 학생들의 패싸움이 민족의 자존심을 건 항일투쟁으로 이어지면서 당시 전국에서 동참했던 학생들은 1930년대 항일 독립운동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학생독립운동은 교과서에 한 줄 스치고 지나가는 것 외에 별다른 홍보도 되지 않고, 조명도 되지 않은 탓에 광주 시민들조차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광주시 서구 학생독립로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워져 있지만 간혹 부모가 교육 차원에서 아이들을 데려오거나 학교 단체관람이 있을 뿐이다. 원래 기념관은 1967년 광주시 동구 황금동에 세워졌으나 공간이 협소하고 노후 돼 지난 200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고등학교, 사범학교(현 광주교대 전신) 등이 주축이 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했다.

▲ 일본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발단이 돼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후 전국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로 확산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3.1만세운동 10년 뒤 타오른 ‘작은 불씨’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태동은 ‘조선 민족을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단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학우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몇 차례의 동맹휴학을 강행하면서 단결력을 키워오던 중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발단이 돼 11월 3일 항일 시위가 전개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이 일본의 폭압에 항거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때부터 5개월간 320학교, 5만 4000명이 참여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 ‘또 한 번의 불씨’가 돼 전 세계로 항일운동의 바람을 일으킨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확산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30년 1월 중순부터는 도시지역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 학교까지 퍼졌고 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했다. 파급효과는 해외까지 뻗어 만주의 간도와 길림성, 중국의 상해와 북경, 일본과 미주지역에 이르기까지 격려 집회와 만세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이어졌다.

▲ 1920년대 후반 장재성 빵집 2층에서 독서회 비밀회합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 ⓒ천지일보(뉴스천지)

◆옥중에서도 노래 부르며 ‘독립’ 외쳐

세계적인 독립운동으로 뻗어간 데는 학생들이 핵심이 된 신간회, 조선청년총동맹, 조선학생전위동맹, 독서회 등 사회 청년단체들의 영향도 컸다. 장재성이 운영하는 빵집은 독서회 회원들의 비밀 회합장소로 이용됐다. 장재성은 1930년 2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예심판결에서 최고형인 징역 7년형을 구형받을 정도로 막중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포상조차 못 받고 있다. 세 차례 월북한 전력 때문에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몇 차례 이어진 시위로 구속된 이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각 학교에 있던 비밀결사가 탄로 나기도 했다. 성진회, 독서회, 소녀회 등에 관련된 학생들이 계속 검거되고 심지어 동경에서 잡혀 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수감돼 가혹한 고문을 견뎌야 했던 학생들은 애국지사들이 불렀던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채찍질했다. 식사시간에는 사식을 통해 외부로부터 쪽지가 없나 뒤져보기도 하고 콩 밥알을 말려뒀다가 윷을 만들어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윷놀이로 우울한 심정을 달래기도 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내부. 독립운동에 대한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구속된 학생들은 옥중에서도 단식, 구호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했다. 1930년 3월 1일에는 수감 학생들이 감방 벽을 두드리는 신호로 일제히 ‘독립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체 항일 민족운동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학생들은 퇴학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1930년대 민족운동의 주역이 됐다.

배민정 문화해설가는 “학생들도 교과서를 통해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 뿐 이런 시설이 있는지도 모른다”며 “체험시설 같은 게 있어서 학생들 더 나아가 시민들의 가슴에 와 닿도록 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SNS를 통한 적극적인 홍보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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