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작가 탄생 100주년

▲ 피천득 선생 (사진제공: 샘터)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지난 29일은 시인 피천득 선생이 태어난 지 꼬박 100해째 되는 날이었다. 한국 문학계에 잔잔하지만 큰 획을 그어 놓은 그는 2007년 향년 97세 일기(一期)로 우리 곁을 떠났다.

싱그러운 5월에 생을 시작하고 마친 그의 삶은 푸르렀으며, 소박하고 단아했다. ‘거문고를 타는 아이’라는 뜻을 지닌 금아(琴兒). 그는 자신의 호(號)인 ‘금아’처럼 평생을 글로 노래했다.

1910년 경술생인 그는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으나 그의 글에서는 세월의 상처를 느낄 수 없다. 전쟁은 그의 잔잔한 일상에 파동(波動)을 주지 못했을 뿐, 그가 시대를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피천득 선생은 소박함과 애잔한 추억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았기에 전쟁 속에서 견뎌낼 수 있었을 터. 이는 시(詩) <인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여인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픈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게 그는 추억을 떠올리며 살았다.

이러한 소박함은 아흔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딸 서영이 그리워 아이가 갖고 놀던 난영(인형)을 제 자식처럼 씻기고 재웠으며, 2002한일월드컵 당시에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붉은 악마>라는 시를 지었다.

피천득 선생은 한결같이 서정적이고 간결한 문체로 시와 수필을 노래했다. 삶이 그대로 녹아든 그의 글은 순수하며, 아포리즘(aphorism, 삶에서 느낀 교훈을 압축해 쓴 글) 형식이 주를 이룬다. 이는 수필 <은전 한 닢>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 걸인이 6개월간 구걸해 모은 동전을 은전 한 닢으로 바꾸고서는 누가 가져갈세라 꼭꼭 몇 번이고 확인한다.

수필 속 ‘내’가 왜 그리 동전 한 닢을 소중히 여기냐고 거지에게 묻자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여기서 피천득 선생은 걸인이 은전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작은 것을 모은 그동안의 노력이 은전 한 닢에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간접적으로 전한다. 타인이 볼 땐 볼품없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만족하면 충분하다는 것. 현재 자신에게 진심으로 행복한지를 물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짙은 녹음(綠陰)으로 넘어가기 직전 연둣빛으로 가득한 신록(新綠), 5월과도 같다. 1959년 작품인 <오월>에서 볼 수 있듯 그에게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이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피천득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중국 상하이 후장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30년 ‘신동아’에서 시 ‘서정소곡(抒情小曲)’으로 등단한 뒤 꾸준한 집필활동을 했다. 해방 이즈음 경성대(서울대) 예과 교수를 거쳐 1974년까지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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