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고추 떼 버려!”
남자 아이가 눈물을 보이거나 힘겨워하면 어른들이 그랬다.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볼기짝이 얼얼해도 모름지기 참아낼 줄 알아야 남자라 했다.

요즘엔 그런 소리 하는 사람 없다. ‘남자도 울고 싶을 때 울고 아프면 아프다 소리하는 게 맞다’고 하는 세상이다. 끄이 끄이 눈물을 흘려도 단지 그가 남자라는 이유로 흉이 되지는 않는다.

여름이 다가오면 남자들은 근육 키우기에 나섰다. 우람한 팔뚝에 꿈틀대는 가슴, 두부판처럼 잘 정돈된 복부 근육은 그들의 로망이었다. 지금은 ‘식스팩’ ‘꿀복근’이라 부르지만 옛날에는 그냥 ‘왕(王)’자 새겨진 배였다.

올해도 여름이 눈앞에 닥쳤다. 계절은 변함없이 다시 돌아왔지만 여름을 준비하는 청춘들의 풍경은 달라졌다.

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근육을 키우겠다며 콧김을 내뿜지 않는다. 대신 여름 햇살에 피부가 상할까 자외선 차단제며 미백제를 사들이고 있다. 남자들의 여름 준비물은 바로 화장품이다.

여자들은 여름을 앞두고 헬스기구에 눈독을 들인다. 피부 관리는 기본이고 멋진 몸매가 당장 급한 것이다. 노출의 계절을 앞둔 그녀들에게 늘어진 살덩어리만큼 부담스러운 것도 없다.

같은 돈이면 남자들은 피부관리에, 여자들은 근육 만들기에 투자한다는 얘기다. 남자는 근육, 여자는 피부라는 등식이 깨져버린 것이다.

예쁜 녀석들이 대접받거나 사랑받고, 엉엉 소리 내 울어도 그것이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흉이 되지 않는다. 백옥색 피부 미인은 여자만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닌 세상이다.

청춘이란 것이 아득한 시절 이미 저 홀로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렇지만 희미할지언정 그 청춘의 자락이 아주 가버리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은, 그럼에도 팔팔한 청춘들의 눈에 과연 저 사람에게도 청춘이란 게 있었나 싶은, 그런 쓸쓸한 세대들에게는 분명 헷갈리는 세상이다.

그래서 과연 요즘 세상에 ‘남자의 자격’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예뻐지고 싶은 그들과 징징대거나 낑낑대는 그들을 동시에 목격하게 된다. 여기서 힌트를 얻는다.

‘여자들이 밥을 사는 그날까지’ 계속 징징대겠다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개그콘서트)’와 살집 좋은 여자 친구를 위해 기꺼이 전용 자동차 조랑말 엘리베이터가 돼, 보는 사람마저 낑낑대게 하는 ‘그냥 내비 둬(개그콘서트)’를 주말마다 만나게 되는 것이다.

과묵한 그가 “경아, 이리 와~” 하면 “아이, 몰라요”하며 수줍어 고개를 돌리던 그녀를 이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지금으로 치면 장동건 고소영에 해당하는 신성일 엄앵란 시절에는 그랬다하면 요즘 청춘들은 선사시대 이야기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다. 그럼에도 퇴화한 남자의 젖꼭지처럼 예전의 그 ‘남자의 자격’을 생각하게 하는 게 있다. 마초끼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오히려 더 걷어 먹이고 더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부실한’ 남자들의 도전기가 눈물겹다.

남자라면 이 정도는 해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게시판의 변(辯)처럼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는 게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열심이다.

KBS 2TV 해피선데이의 <남자의 자격>에서 남성적이지 않아서, 그래서 안타까워 보이는 그들의 분투를 통해 과연 이 시대 ‘남자의 자격’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그들이 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또 낄낄대며 그들을 지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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