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운길 교령은 수도와 포덕에 열중해 천도교 본연의 모습으로 부활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신앙정신 되살려 종교로서의 면모 회복할 터”

“천도교를 하나의 정치단체로 보거나 지나간 역사로만 보는 분들도 계시지만 사실 천도교는 이제부터입니다.”

지난 4월 천도교 신임 교령으로 선출된 임운길 교령은 그동안 사상과 철학 등에 치중해 있던 천도교를 수도와 포덕에 열중해 천도교 본연의 모습으로 부활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임 교령은 수련을 통해 깊은 영성을 소유하게 된 인물로 정평이 날만큼 새벽수련을 삶의 일부로 여기고 지내온 천도교 내 어른이다.

사촌형의 권유로 오산학교에 다니던 1945년 천도교에 입교한 임 교령은 “제가 고향이 북한이라요. 제가 살던 당시 북한에서는 천도교가 굉장히 번창했드랬지”라며 “광복 후 불과 몇 달 만에 신도 수가 몇 백만이 됐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평안북도 박천이 고향인 임 교령은 1950년 월남을 선택한 후 서울로 들어오게 됐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혈혈단신이 된 임 교령은 그때 수련·수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고 한다.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수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한 50년간 매일 새벽수련을 했드랬죠. 그랬더니 여기에 정말 인간답게 사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드랬어요.”

임 교령은 행복의 길, 나와 내 가정이 그리고 이 민족과 인류가 더불어 잘사는 길이 바로 ‘수련’ ‘정신개벽’에 있다며, 이 방법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임 교령은 “‘이신환성(以身換性)’이라는 말이 있는데 천도교의 독특한 낱말이라 사회에는 잘 모르는 말일 것”이라며 “이는 의암 손병희 성사께서 수련할 때 중요한 주제로 잡은 것으로 ‘육신을 성품으로 바꾼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지극한 수련을 통해 본성을 회복하고 본성에 의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강조한 법설이라는 것이다.

“육신과 성령이 있는데 육신은 한때의 객체요, 성령이 영원한 주체지요. 성령을 주체로 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해요. 다시 말해 정신혁명, 정신개벽이라고 할 수 있갔지요.”

▲ 임운길 교령은 “남북통일이 되려면 정신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며, 그것이 바로 ‘3·1운동정신’이라고 말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내내 정신수련, 정신개벽에 대해 강조한 임 교령은 “남북통일이 되려면 정신적 기초가 있어야 되지 않겠소”라고 반문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것,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신학·정신·사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러한 정신과 사상이 역사 이래 우리 민족을 하나 되게 만든 ‘3·1운동정신’이라는 것이다.

“천도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혁명, 사회운동, 이런 것으로 역사를 이루어왔다면 이제는 ‘정신개벽운동’이 세상을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임 교령은 “제가 나이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교령이라는 직책을 맡게 된 것은 아마도 ‘정신개벽운동’을 주도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시오”라며 “우리부터 시작해야지요. 수련을 통해 자주정신을 되찾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지요”라고 말했다.

천도교는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민족종교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앞장섰던 종교이자, 민중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특히 포덕 46년인 1905년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에 선포한 의암 손병희 선생의 주도 아래 3·1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3·1독립운동 이후 천도교청년당은 민족의 문명의식 고취와 새로운 문명, 문화를 통한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어린이운동·여성운동 등 각 계층을 망라한 전방위적인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천도교는 일제강점기 말 급속도로 늘어나는 천도교인에 위협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잠시 주춤하게 된다.

임 교령은 “일본이 교활한 방법으로 천도교를 많이 탄압해서 왜정말기에는 천도교인이 거의 없어졌드랬지. 그러던 것이 8·15광복이 되면서 또 다시 ‘확’ 일어났드랬어”라고 말했다.

이어 151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난을 겪어온 것은 “‘너와 내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엄하고도 평등한 인간이라는 ‘시천주(侍天主)’의 신념체계 때문”이라며 “이 시천주 이념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많은 수난을 겪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던 천도교가 침체된 것은 의암성사(손병희) 이후 수도연성에 너무나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임 교령은 “종교생활은 신앙이 최우선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했지요”라며 “이 때문에 사람을 한울님같이 대하라고 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했고 이것이 교단 침체의 원인이 됐다”고 꼬집었다.

▲ 임운길 교령. ⓒ천지일보(뉴스천지)

천도교는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던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교육’에 있다는 생각으로 과거 의암 손병희 선생이 경영권을 인수해 1913년 사립 보성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지금의 보성중 ·고등학교를 비롯해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와 동덕여고 등 30여 개에 달하는 학교를 직접운영하거나 지원했다.

임 교령은 “과거 30여 개에 달하는 학교가 있었지만 지금은 학교가 없지 않소”라고 안타까워하며 “지금 천도교에서 직접 운영하는 것은 당국의 인가를 받지 못한 종교학 종학대학원 하나가 있을 뿐이요. 앞으로 대학원대학교라든가 대학이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소”라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임 교령은 천도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뿐만 아니라 홍보활동에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천도교를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데 영화도 하나 제작할까 구상하고 있지요. 방송국도 구상 중에 있는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갔어요.”

이어 임 교령은 “수운대신사(최제우)께서 포덕 원년 경신년 4월 5일 한울님으로부터 만고 없는 무극대도를 받은 천일기념일(天日記念日)을 국정공휴일로 제정해 온 국민이 경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천도교의 신문화운동 사상과 3·1운동 정신 등 천도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아왔던 종교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 교령은 “종교의 장벽을 넘어서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된 것, 아마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서 우리 동포가 하나 된 것은 3·1운동밖에 없을 것”이라며 “또 다시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

오전 5시 청수(淸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임 교령은 민족의 자주통일을 위해 먼저는 교단 핵심인자라 할 수 있는 정신개벽지도자 500명을 단계적으로 육성해 나갈 생각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임 교령은 “의암 손병희 성사께서 경술국치를 당한 후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선보였드랬어. 3·1운동에 앞서 봉황각에서 3년간 7차례에 걸쳐 483명의 핵심인자를 길러냈지”라며 “한꺼번에 결과를 낼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수련을 통해 다시 민족의 얼과 정신을 되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수련과 신앙의 영성을 다시 살려 천도교 제2의 부흥기를 꿈꾸는 임운길 교령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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