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5·18 광주민중항쟁 30주기를 맞았다.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장기 집권을 누려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재가 붕괴되었다. ‘하나회’라는 군사조직을 이용한 전두환은 그 해 12월 12일 군사쿠데타에 성공, 이듬해 계엄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오르며 정권쟁탈을 시도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학생과 시민 20만여 명은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했다. 그날 서울역에 모였던 군중은 군사정권의 압력에 밀려 자신의 학교와 일터로 돌아갔다. 이틀 후인 5월 17일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학생운동 지도부와 주요 민주 인사들은 체포 또는 수배됐다.

1980년 5월 18일 전국이 침묵했지만 광주는 불의에 저항했다. 등교하던 광주지역 대학생들이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항거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은 시작했다. 2~3천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시장 상인과 시민이 가세해 금세 10만 명을 넘어섰다. 시위가 길어지면서 시민들의 희생도 커졌다. 5·18기념재단 자료에 의하면 당시 민중항쟁 사망자는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부상자는 5019명이다. 사망자 중 30여 명은 18세 이하다.

자신의 정권탈취를 위해 만행을 저질렀던 前 전두환 대통령은 1996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노태우 前 대통령은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모두 불과 1년여 만에 사면됐다. 희생자들의 원혼과 유족의 아픔을 달래기엔 너무 어이없는 처벌결과였다. 당시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은 그곳에 투입된 특수부대원조차 공산당 토벌로 알았을 정도로 철저히 감춰지고 왜곡됐다. 국내 언론은 침묵했고, 진실은 정권교체 후 이루어진 진상 규명을 통해서야 밝혀졌다. 진상 규명 후에도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의 곁눈질은 광주시민을 오랜 세월 괴롭혔다. 광주 사람을 간첩 보듯 한다거나 광주 사람이라 차별받았다는 소식이 종종 들려왔다. 그렇게 긴 세월 광주 시민들이 억울해하고 아파하고 나서야 세상은 5·18의 진실을 인정했다.

진실을 쉽게 믿으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 왜곡보도에는 쉽게 동조하면서 정작 진실을 알려주면 부인하는 세태가 일반화 되고 있다. 언론의 왜곡 보도에 지쳐서인지 믿기 싫은 진실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밝혀진 진실에 등 돌리는 나로 인해 피해자들은 더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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