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리 작가

올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은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10년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조선과 일본의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는데 이 조약으로 조선의 국권은 상실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현실인식과 함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자 함이다. 100년 전 조선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1876년, 조선은 일본의 강압적인 통상요구로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조약을 맺은 후 개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05년에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었다. 이 때 조약에 찬동한 5명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부르니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전중현 등이다.

이로써 일제는 조선강탈의 교두보를 얻은 셈이었다. 개항 후 조선의 운명은 개화파와 척화파의 갈등 속에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빛을 잃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충정의 불길도 활화산처럼 일어났으며 이 시기에 많은 여성들도 동참하였음은 물론이다. 윤희순은 최초의 여성의병장으로 꼽힌다.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사실이 알려지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윤희순(1860~1935)은 이 때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도 구국에 나서야 한다고 계몽하였던 여성의병지도자였다. <안사람 의병가>에는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의병 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라고 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자 분노한 전국의 유생과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하였다. 윤희순은 30명의 안사람 의병단을 이끌고 군자금모금과 함께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여 무기와 화약을 만들어 보급하였다. 현재 춘천의병마을에 그 터가 남아있어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의병장이던 윤희순의 시아버지 유홍석은 만주로 떠났고 2년 뒤 윤희순 일가는 뒤쫓아갔다. 그녀는 민족학교 ‘노학당’을 세워 직접 학생들에게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여 노래를 가르쳤다. ‘살 수 없다 한탄 말고 나라 찾아 살아보세 전진하여 왜놈 잡자. 남김없이 모두 잡자.’ 윤희순은 매일같이 30km나 떨어진 집과 학교를 오가며 학교운영기금과 항일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일제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 중에는 ‘조선 여자 윤교장’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후 세 아들도 독립군으로 만들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5년 장남이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죽고 며느리마저 잃자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현재 우리나라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어쩌면 개화기 이후 열강에 둘러싸여 있던 현실과 해방 후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의 이해가 충돌하던 한반도의 사정, 그리고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독립이다. 그리고 그 교육의 중심에 여성이 서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이 땅의 여성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그리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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