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민 의병장이 활약했던 강화도 남문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뉴스천지)

인력거꾼으로 위장, 적진에 뛰어 들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8월의 독립운동가로 인력거꾼으로 위장해 적진에 뛰어든 신출귀몰한 농민 의병장 김수민(金秀敏) 선생이 선정됐다.

4일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에 따르면,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수민 선생은 대표적인 농민의병장이다. 일찍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해 반일투쟁을 경험했던 김수민 선생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활동에 나섰다.

김수민 선생은 경기 장단・마전 지역을 중심으로 700명의 의병을 지휘해 1907년 10월 고랑포(高浪浦) 헌병분파소를, 11월에는 풍덕군 영비포(領非浦)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1908년 초에는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13도창의대진소 연합의병에 가담했다. 하지만 서울진공작전이 1908년 2월 좌절된 후 김수민 선생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장단군 방면으로 되돌아와 유격전을 기본 전술로 하는 의병부대로 재구성했다.

1908년 4월 20~30명의 유격대로 구화장(九化場) 헌병분파소를 공격했으며, 10월에는 근거지를 점차 남쪽으로 이동시켜 강화도를 기습 공격하는 등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1908년 11월 대대적인 의병탄압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김수민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활동은 전에 비해 매우 침체됐다.

이에 김수민 선생은 일본군 정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총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는 등 새로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서울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경부(京部) 이화령(梨花寧)과 북부(北部) 제동(齊洞)에 거주하며 인력거꾼(車夫)으로 위장한 후 활동하곤 했다. 이 기간에 김수민 선생은 자신이 지휘하던 의병세력을 동생이자 선봉장이었던 김백수(金白洙)에게 담당케 했다. 그러나 활동상황이 일경에 포착돼 김수민 선생은 1909년 8월 12일 오후 1시 부하 2명과 함께 붙잡혔다. 체포 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고 1909년 10월 14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동년 12월 17일 순국했다. 정부는 김수민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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