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범려의 재물 나누는 법

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은 회계산에서 오나라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범려와 계연을 등용하여 굴욕을 견디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계연은 우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경제 이론을 펼쳤다.

“전쟁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 그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때그때 무엇이 필요하게 되는가는 사전에 알 수가 있게 된다. 이 도리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으면 수급(需給)의 움직임을 훤히 알 수 있다.

오행설에 따르면 목성이 금에 있는 해는 풍년이고, 수에 있으면 수해가 있고, 목에 있으면 흉년이 들고 화에 있으면 가뭄이 들므로, 앞으로 닥칠 수해를 예상하여 배를 사들이고, 수해 때는 반대로 수레를 사들여 미리미리 앞일에 대비하는 것이 경제 원리이며, 풍년과 가뭄은 6년에 한 번 정도 일어나고 12년에 한 번은 대흉년이 찾아온다.”고 했다.

상업이 잘 안 되면 물자의 유통이 막히게 되고, 농민이 피폐하게 되면 식량이 생산되지 않는다. 물자 저장의 원칙은 품질의 유지를 그 첫째 요건으로 한다. 교역을 할 때는 변질되기 쉬운 물자는 오래 두지 말아야 하며, 또 비싼 물자를 언제까지 가지고 있는 것도 피해야 한다.

수요와 공급의 비율에 착안하고 있다면 가격 변동의 추세는 일목요연한 것이다. 물가가 최고에 달하면 떨어지고, 물가가 최하로 떨어지면 다시 상승하게 된다. 물가가 오르고 떨어짐에 따라 사고파는 것을 즐거이 하여 화폐와 물자를 흐르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순환시키는 것이 긴요한 것이다.

월왕 구천은 계연의 경제 이론을 20년 동안 성실히 실천했다. 그 결과 국가의 재정은 풍부해졌고, 훈련을 받는 병사들에게는 후한 상을 줄 수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오나라에 보복하기 위한 전쟁에서 병사들은 서로 다투어 공(功)을 세우려 감전분투 했으며 드디어 오랜 숙원이었던 오나라 왕 부차를 궁지로 몰아 자살하게 만들어 승리를 거두었다.

월나라 구천이 옛 명성을 되찾고 중원으로 진격하여 5패의 하나로 꼽히게 된 것은 경제 이론에 따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20년 만에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계연의 경제 이론에 대하여 탄식을 했다. “계연의 경제 이론은 7개 조항이었다. 우리 월나라는 그 중 5개 조항만 실행한 것뿐인데도 숙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국정에 대한 그 유효성이 이미 밝혀진 만큼 이번에는 이것을 가정에 응용하고 싶다”며 범려는 월왕 구천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미련 없이 월나라를 떠나 버렸다.

그는 구천의 관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와 함께 역경과 고난은 이겨낼 수 있으나 부귀영화는 함께 누릴 수가 없는 인물이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탐욕스러운 그의 밑에서는 죽음 밖에는 없다.” 범려가 월나라를 서둘러 떠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자유인이 된 범려는 제나라로 가서 이름도 ‘치이자피’로 바꾸어 버렸다. 그는 제나라에서 교역을 하여 수천금을 모은 뒤 도(陶)나라로 갔다.

범려는 “도나라는 천하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러 나라의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라며 그곳에 정착하여 이름을 도주공이라 고쳐 불렀다. 범려(도주공)는 도나라에서 교역을 하여 모두 세 번에 걸쳐 수만금의 이익을 남겨 재물을 축적하였으나 개개인으로부터 무리하게 이익을 취하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는 사업의 수완을 발휘하여 이익은 얻었으나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다만 시세를 좇아 경영을 할 뿐이었다.

범려는 그렇게 하여 큰 재물을 모았으나 두 번 모두는 가난한 사람들과 친구, 그리고 먼 친척에게까지 고루 나누어 주었다. 범려의 처사야말로 부귀해지면 더욱 덕을 높이려 하는 사람의 표본이었다. 그는 늙어 가업을 자식들에게 맡겼는데 그들도 사업의 요령을 잘 터득해 마침내 억만장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도주공(陶朱公)이라고 하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제인의 모범으로 추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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