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여성가족부가 전국 성인남녀 7200명을 상대로 한 ‘2016년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남성 응답자의 55%, 여성 응답자의 42%가 ‘여자들이 조심하면 성폭력은 줄일 수 있다’고 답했다. 또한 남성 응답자의 54%는 아직도 여성들의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통계는 그동안 우리나라가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하고 가해자 엄벌정책으로 신상공개와 전자발찌, 화학적거세 등 법과 제도는 발 빠르게 마련했지만, 사람들의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더디게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 1955년, 해군 헌병대위를 사칭해 70여명의 여성들을 만나오다 그중 두 명의 여성에게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를 당한 박○○ 사건을 살펴보자. 당시 박씨는 1심 법정에서 “누구와도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그녀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으며 70명 중 처녀는 단 한 명이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심 재판부는 “법은 보호할만한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며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댄스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내놓은 정조가 아니라며 징역 1년형을 선고했고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62년 전 일어났던 이 사건과 엊그제 발표한 우리 국민들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 조사결과는 참 많이 닮아있다. 예나 지금이나 성폭력 피해자들은 옷차림이나 몸가짐에 문제가 있거나, 뭔가 당할만 했다는 의심과 비난의 시선 속에 갇혀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피해자들에게 피해사실을 드러내지 못하게 작용한다. 아직도 우리나라 성폭력 신고율은 10%를 넘지 못하고 있음이 이를 방증한다. 성적 수치심이나 비난은 가해자의 몫이여야 함에도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으로 인해 오히려 피해자를 겨냥하고 있다. 학교나 직장에서 매년 의무적으로 성폭력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편, 이러한 잘못된 인식과 관행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한 대학의 총학생회장이 교내 장터에서 한 여학생에게 여성을 꽃으로 성적 대상화 하는 발언을 하고 새내기 새로 배움터에서 외모비하성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져 직무정지가 되고 사퇴권고안이 의결됐다고 한다. 또 다른 대학에서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들의 성희롱적인 언행을 문제제기 하며 “선배님 OT는 애인 찾는 장소가 아닙니다” “새내기는 너의 잠재적 여자친구가 아닌 동등한 학우입니다” 등의 대자보를 붙여 이러한 분위기가 결국 성폭력을 발생하게 하는 문화가 된다며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 실제 성폭력상담현장에서 보면 많은 피해자분들이 침해당한 자신의 인권을 회복하고자 가해자를 고소하거나,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치유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며 힘을 내고 있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일반적인 시선과 실제 피해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평생을 ‘소극적이고 불쌍하게 살아갈 존재’가 아니라, 피해자로서 권리를 보장받으면서 치유하고 일상을 회복해 가야 한다. 또한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고 온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성폭력은 ‘정조에 관한 죄’가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한 행위로 인식하는 것은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깨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