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이후, 한글 활자꼴을 다듬는 일에 일생을 바친 고(故) 최정호 선생(1916~1988). 약 40년간 한글 서체 원도(활자를 만들기 위해 그린 글자꼴의 씨그림)를 연구해 30여종의 인쇄 서체를 개발했다. 대표적으로 서적 출판에 적합한 ‘바탕체’와 ‘돋움체’를 완성했다. 선생의 원도 개발은 우리나라 출판물에 쓰이는 글자체 원형 대부분을 이뤘다. 끈기와 노력, 인내를 보여준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자.

※이 기사는 1970~80년대 ‘인쇄문화’ ’한글새소식’ 등에 실린 간증을 1인칭 소설형식으로 풀었다.

 

▲ 고(故) 최정호 선생이 살아생전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모습. (제공: 국립한글박물관)

바탕·돋움체 만든 고(故) 최정호 선생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네모란 작은 공간 속의 엄격한 제약. 그 안에서 예쁘게 다듬어야 하는 서체 개발 작업. 그 화려하지 못한 작업을 나는 천직으로 삼았다. 확대경 속을 들여다보며 0.1㎜의 오차도 찾아내야 했다. 글자 하나하나에 내 혼이 박힐 정도로 전력을 다했다.

글자꼴이란 건, 글자 하나하나가 균형이 잡히되 그 글자들이 저마다 다른 글자들과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었다.

당시 동경에서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을 상대로 가끔 한국 영화를 돌렸다. 영화 선전물이나 간판의 한글을 쓰게 되면서 그림보다 글씨 쪽에 마음이 쏠렸다. 일본이나 서구의 예쁘게 가다듬어진 글자꼴을 보면, 나도 한번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었다.

◆글꼴은 변한다

지금 쓰고 있는 ‘명조’도 현재로써는 많이 쓰이고 좋다고 하지만, 명조도 도태돼야 할 때가 있어야 한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명조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 인간의 감각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글씨에 대한 평가도 고정불변일 수는 없다. 그래서 서체 연구가가 계속 출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새로운 서체가 자꾸 개발돼야 한다.

▲ 최정호체 ⓒ천지일보(뉴스천지)

◆글꼴제작 원리

글꼴제작에서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가독성’이다. 글자의 모든 변형은 원리 원칙을 이해한 뒤에 행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그래야 좋은 결과를 얻는다.

2000여의 자모가 필요한 한글 서체의 개발을 끝내는 데 보통 여섯 달이 걸렸다. 글자가 잘 되는 날이라야 하루 고작 20자까지 쓸 수 있었다. 선을 잘 긋거나, 손재주만 있다고 해서 글자 모양이 잘 그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한글 서체의 기본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모양 좋은 글자를 만들 수 있다.

서체 개발은 활자 문화의 기초 과학이다. 글자가 의사소통의 부호라면, 활자 서체는 그것을 보기 좋게 미화 포장하는 작업이다.

최정순이라는 사람은 신문 식자의 글자체를 대부분을 개발했고, 난 주로 서적용 글자체를 만들었다. 글자가 눈에 거부감을 주지 않고 또 아름답다는 것은 글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 속도가 빨라진다는 말이다.

◆장인정신의 대물림 필요

언제든, 누구엔가는 이 대를 물려야 한다는 각오를 갖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먼저 기초를 닦고 나서, 이미 나와 있는 책들이 많으니까 자꾸 보면서 자기 혼자 갈고 다듬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경험자라고 해서 ‘이렇게 해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를 일일이 가르쳐줄 수는 없는 일이다. 한글은 그렇게는 안 된다.

외국에서는 대를 이어서 글자꼴을 개발해왔다. 중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알파벳의 아름다운 모양도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스물여섯 글자만 쓰면 되는데도 거기에 일생을 건 거다.

▲ 고 최정호 선생의 작업도구 ⓒ천지일보(뉴스천지)

요즘 젊은이들의 체질에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원체 지루하고 따분한 작업이다 보니 처음에는 제법 의욕들을 가지고 덤벼들다가도 몇 달이 못 돼 도망을 치고 만다. 장인 의식이 있어야 한다. 장인 의식을 갖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이 직업인가 보다.

오랜 경험에서 느낀 점인데, 일단 뜻을 두고 이 작업에 손대었으면, 꾸준한 노력과 끈질긴 집념으로 도중 포기함이 없도록 단단한 각오를 해야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다.

◆나이 잊은 열정

칠십을 넘었는데도 내 자신 늙었다는 생각이 통 안 든다. 이 붓만 잡으면 다 꺼졌던 힘이 샘솟는다. 노안이라서 쉬 피로해진다. 그래도 나이 들면서 확대경에 잡히는 글씨의 모양새 판단이 달라진다. 아무래도 경험이 제일인 듯하다.

다리가 아파서 걸어 다니는 덴 무척 불편을 느끼는 나이다. 하지만 손은 아직 움직일 수 있으니, 움직임이 멈출 때까진 계속 자모를 개발해야 한다. 앞으로 4~5종 정도는 더 해놓고 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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