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덕혜옹주. (제공: 국립고궁박물관)

고종, 환갑에 덕혜옹주 얻자
아이 보려고 관례 깰만큼 아껴
서녀지만 황적에 올리려 애써

옹주만을 위한 왕실유치원 설치
혹시 친구 없어서 외로울까봐
대신·지인 자녀 함께 입학시켜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의 일대기가 적힌 권비영 작가의 소설 ‘덕혜옹주’를 읽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덕혜옹주를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고국으로 돌아오고자 했으나 아무런 힘이 없어 돌아오지 못했던 덕혜옹주는 그 시대의 슬픈 역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비운의 삶을 살았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온다.

▲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앞줄 가운데). (제공: 국립고궁박물관)

◆고종, 덕혜옹주에 태어나자 ‘딸 바보’ 등극

1912년 5월 25일 회갑을 맞은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의 거처 덕수궁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종과 복녕당 양귀인의 사이에서 낳은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이덕혜(1912~1989)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소주방 나인 출신인 어머니 양귀인은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고종은 늦둥이 덕혜옹주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당시 아이를 낳은 지 스무하루째 되는 날인 삼칠일(三七日) 전에는 아이를 보면 안 된다는 관례가 있었는데 고종은 덕혜옹주가 태어난 지 2일째 되던 날 아이를 보러 갔다.

고종의 일상을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贊侍室, 오늘날의 비서실) 일기에 따르면 “오후 7시 55분에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탄생하였다.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납시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3일째 되는 날에는 흥친왕을 비롯한 종친들이 덕수궁으로 달려와서 문안을 드리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종척(宗戚, 임금의 친족과 외척)들의 알현을 하기도 했다.

옛 속담에 ‘회갑 해에 태어난 자녀는 그 어버이를 똑같이 닮는다’는 말이 있듯 덕혜옹주는 고종의 축소판같이 똑 닮았다.

‘딸바보’로 등극한 고종은 덕혜옹주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옹주를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순종실록(1912년 7월 13일)에 보면 “덕혜옹주가 태어난 지 50일째, 태왕전하가 복녕당에 나아가 새로 태어난 아지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환차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실록을 기준으로 보면 왕녀가 태어나서 이렇게 환영받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은 5살 된 덕혜옹주만을 위한 왕실유치원 준명당(浚明堂)을 설치한다. 왕실에 유치원이 생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또 덕혜옹주가 외롭지 않도록 대신이나 지인들의 자식들을 동급생으로 함께 다니게 했다. 함녕전에서 준명당까지 불과 150m 정도 거리였지만 고종의 명령으로 덕혜옹주는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유모 변복동이 항상 함께 다녔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후 일제의 탄압으로 황제의 자리에 물러난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고종에게 덕혜옹주는 한 줄기 삶의 낙인 셈이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으로 주권을 상실하고 1911년 사랑하던 여인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자 고종은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중 딸 덕혜가 태어났다. 그리고 이 시기는 덕혜옹주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 14세 때 양장을 착용한 모습. (제공: 국립고궁박물관)

◆가혹한 운명의 시작

고종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당시 왕족이 태어나면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데 사랑하는 딸 덕혜옹주가 서녀(庶女)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뜻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던 일본에게는 조선 왕실이 늘어나는 것을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덕혜옹주를 인정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모든 조선 왕실자손의 입적을 해야 하기 때문.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을 측근에서 보필하던 곤도 시로스케의 회고록인 ‘이왕궁비사(李王宮秘事)’에 보면 “덕혜는 덕수궁 이태왕 전하의 만년 복녕당 양귀인이 낳은 아이로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왕가에 입적시키는 절차가 아주 어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고종은 한 가지 꾀를 쓴다. 조선 총독으로 무단 식민정책을 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를 덕수궁으로 초대해 옹주를 소개하는 것이다. 고종은 “격무에 시달릴 때는 어린아이를 보는 게 최고지요”라며 데라우치를 준명당으로 데리고 간다.

이왕궁비사에는 “고종이 ‘이 아이가 내가 만년에 얻은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있기에 덕수궁이 웃음소리로 넘칩니다’라고 말하며… 데라우치는 ‘귀여운 아이군요. 어린 자식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겠습니다’”고 기록됐다.

이 일로 마침내 덕혜옹주는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덕혜옹주의 황적은 그를 가혹한 운명으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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