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호랑이굴로 들어간 독립운동가 문창학
[역사기획] 호랑이굴로 들어간 독립운동가 문창학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윈스턴 처칠 1965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 Winston Churchill

不入虎穴, 焉得虎子
불입호혈 언득호자
(뿌루후쉬에 이엔더후즈)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으랴?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인한 일본은 제1차 한일강제협약 이후 더욱 치밀하게 한국 식민지 정책을 마련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참담한 현실을 맞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 [乙巳勒約]
: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1910년 경술국치
: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

대한제국 통치권을 일본에게 강제로 빼앗긴 날.

나라 잃은 슬픔, 그 당시 한국 청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꿈 많던 대한의 청년 문창학 선생 또한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문창학은 농사짓기 좋은 평야지대인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에서 태어났다.

함경북도 온성군 주위로 두만강(豆滿江)이 흐르고 있는데 ‘두만’이란 이름만큼 콩이나 곡식농사가 잘됐던 곳이다.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진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선생은 어릴 적부터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1910년 전까지 말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도 잠시, 일본인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문창학 선생을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독립운동가 문창범선생이다.

문창범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으로 문창학의 사촌형이기도 하다.

1910년대 문창범은 독립을 목적으로 권업회를 조직하고 러시아지역 항일운동을 체계적으로 이끌어 나간 인물이다.

사촌형인 문창범의 독립활동을 모를리 없는 문창학은 문창범과 같은 독립운동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게 된다.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문창학은 함경북도 신건동의 일본경찰 주재소 헌병보조원으로 들어간다.

2개월의 짧은 헌병보조원 생활을 마치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문창학 선생은 서둘러 만주로 넘어가 대한군정서(만주에서 결성된 독립군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3대대 15명으로 조직된 독립결사대는 국내로 진입해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기관들을 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기로 결의한다.

[인터뷰: 문영화 / 문창학 선생 증손자]
“문창범 할아버지가 지시를 해서 들어갔으니까
주재소 인원은 몇 명인지, 시설은 어디니, 문은 어디있는지
어디를 습격해야 효과가 있는 지 이런 것을 파악이 가능한 거죠
그 내용을 알고 난 다음에 그만두고 나오셔서 바로 대한군정서에서 일하시게 되거든요
들어가서 일한 기간이 짧잖아요. 두 달 정도 되거든요.
누가 봐도 보조원 하러 들어간 사람은 아니죠. 그쵸?
보조원 하러 들어갔으면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거나 해야 되는데
생계가 어려우신 분도 아니고..”

[신건원 주재소 습격사건]

1922년 1월 2일.

함경북도 웅기군의 경찰서와 금융조합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모인 독립결사대.

그러나 웅기항 근처 일본군의 경계가 삼엄해 지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김학섭: 일본군의 경계가 삼엄해 자칫 잘못하면 거사를 치르기도 전에 실패할 수도 있을 걸세. 어떻게 하면 좋겠나.

문창학: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하는 것이 어떻겠나.
김학섭: 아, 그렇지. 자네가 신건원 주재소 헌병보조원으로 일한 적이 있지 않은가.
자 그럼 문창학 동지, 계획을 말해보게.

신건원 주재소 내부를 훤히 꿰뚫고 있는 문창학 선생의 주도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1922년 1월 5일.

모두가 잠든 새벽 정오 12시 30분.

신건원 주재소를 먼저 도착한 문창학은 자신의 위치를 불빛으로 알렸다.

얼마나 흘렀을까.

일제히 빗발치는 총소리와 함께 주재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총소리에 잠을 깬 일본군이 반격을 가해 왔지만 결사대는 굴하지 않고 싸웠다.

일본 순사 송기안태랑이 사살되자 거사는 마무리 됐다.

문창학 선생이 아니었더라면 습격은 물론 탈출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독립운동가 문창ㅇ학 선생 증손자 문영화씨.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문영화 / 문창학 선생 증손자]
“습격 할 수 있었던 게 그 통로라던가 인원이 몇 명이 되는지
폭탄이 어디있는지, 이런 것을 너무 자세하게 할아버지가 아니까
그러니까 가능한 것이지, 도망 갈 때도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게
어느 문으로 도망가면 된다는 걸 미리 작전 짤 때도 그래서 가능한 것이였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무서운 독립 의지를 또한 번 확인했다.

이 일로 신건원 주재소 습격 사건은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독립 투쟁의 역사중 하나로 남게 됐다.

잘못하면 꼼짝없이 잡힐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은 아끼지 않고 일본군과 싸워냈다.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한 신념하나로 목숨까지 서슴없이 내놓았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들.

이러한 정신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건원 주재소에서 큰 성과를 거둔 독립결사대는 더욱 의기투합해 일경 습격과 밀정처단에 힘을 썼다.

독립군이 성과를 거두면 거둘수록 결사대를 잡기위한 일본 경찰의 추적도 만만치 않았을 터.

1922년 12월.

독립 결사대는 결국 체포 된다.

[인터뷰: 문영화 / 문창학 선생 증손자]
“11명이 붙잡혀서 재판을 받게 돼서 4명 사형당하고 7명이 무기징역을 당했는데
그 당시까지도 세 분은 돌아가시고 4분이 살아계셨다고 하더라고..
그분들이 할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다고 하면서..”

신건원 주재소 습격을 주도한 문창학과 결사대를 총 지휘한 김학섭은 사형을 선고 받는다.

1923년 12월 20일. 문창학 선생은 사형 순국했다. 그의 나이 41세.

내 나라 내 민족을 지키기 위한 희망 하나로 달려온 독립투쟁.

그저 나의 자식들에게는 나라 없는 서러운 삶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

젊은 날의 문창학 선생의 희망은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리운 내님’ 독립운동가 문창학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떠나간 님을 그린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

그러나 노랫말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뼈아픈 이야기가 담겨있다.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사연]

한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

여인의 이름은 김증손녀.

독립운동가 문창학선생의 부인이었다.

[인터뷰: 문영화 / 문창학 선생 증손자]
“할머니가 할어버지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돌아가신 줄 모르고 찾으러 독립군 부대로 다녔나 봐요. 만주쪽에.. 그러다가 어느 여관에 머물게 되잖아요.
근데 그 여관이 또 할아버지가 자주 주무시던 곳이래.
그 여관 주인이 할아버지도 알고 할머니도 알고 다 아는 것이지.
그날이 또 할아버지 생신인데 그날 그 얘길 들은거에요.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그래서 울고 있으니까
그 여관 주인이 할아버지 돌아가셨으니 제사상을 봐 온 거죠.. “

조국을 광복시키겠다는 결심을 하나로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이곳저곳 남편을 찾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하필 사망 소식을 들은 날이 바로 문창학 선생의 생일이었다.

같은 여관에 머물렀던 작곡가 이시우도 함께 슬퍼했다.

빼앗긴 조국에 대한 서러운 마음이 두만강을 따라 조용히 흘러들어왔다.

순간 잔잔한 두만강의 물줄기가 나라 잃은 백성들이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같이 느껴졌다.

그러자 이시우에게 악상이 떠올랐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이곡은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곡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구슬픈 가락과 노랫말이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한국에서는 문창학 선생의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북한에 남아있는 문창학 선생의 후손들이 선생의 묘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어렵게 한국으로 건너온 문창학 선생의 나머지 후손들은 매년 12월 20일 제사를 지낸다.

2016년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문창학 선생.

비록 선생의 사진 한 장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의 강하고 위대한 독립투쟁은 영원히 기억 될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토록 위대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선조들의 아름다운 희생 때문이다.

나라 사랑과 애국에 대한 보답은 지난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다.


기획/취재/편집: 서효심
촬영: 황금중
녹음: 박완희(김학섭), 황시연(문창학)
나레이션: 서효심
자료제공: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대한임시정부기념사업회
도움주신 분: 문영화(문창학 선생 증손자), 김미경 교수

* 그동안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독립운동가 문창학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스토리텔링 김미경 교수. ⓒ천지일보(뉴스천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