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 칼럼니스트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의 목조 미륵보살반가상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지만 국보 제1호다. 이 불상을 직접 본 독일의 철학자 야스파스는 ‘최고의 미소’라고 극찬했다.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반가상에 빠져 한술 더 떴다. “일본이 만약 침몰하여 나에게 하나를 고르게 한다면 이 불상을 선택하겠다”라고.

불가에서 미륵은 부처가 되기 이전의 보살(菩薩). 민생의 고통을 해결해 줄 미래불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았던 삼국시대 유행했던 불상이다. 그래서 미륵보살의 얼굴은 태자상, 즉 청소년상을 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

30년 전 고류지 수학여행을 왔던 일본여고생이 코를 잘 못 만져 떨어져 나가 전국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다행히 코는 회수됐지만 이 불상을 대하는 일본 국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열정은 전 세계에 화제를 뿌렸다.

그러면 이 반가상을 만든 주인공은 과연 어느 나라였을까. 일본과 긴밀하게 유대를 맺은 백제였을까, 아니면 적대국 신라였을까. 일본학자들은 불상의 재료가 경주 근방에서만 나는 적송(赤松)이란 과학적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서울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금동미륵반가상과 비교하여 백제일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일본 미술사학자 미스자와 스미오(水澤澄夫) 교수는 신라 편에 선다. “고류지를 처음 세운 하타노카와카쓰(秦河勝)는 신라계다. 그가 서기 603년 아스카의 왜 왕실 쇼토쿠태자에게서 반가상을 모셔왔다”고 했다.

그런데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 등은 저서를 통해 백제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고류지 사적기에 보면 스이코천황(推古, 592∼628) 11년(AD603) 미륵보살 반가상을 백제에서 헌상(獻上)했다고 한다. 하타노카와카쓰는 이 불상을 쇼토쿠태자로부터 선물 받아 고류지의 전신(前身)인 하치오카데라(蜂岡寺)를 지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 신라나 백제왕실에서 우호적으로 일본 왕실에 보내진 것일까. 일본학자들의 주장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일본서기를 믿지 못하는 데 있다. 백제 왕실에서 보내졌다면 이해되지만 신라에서 가져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당시 왜는 동해를 건너 감포(甘浦)를 통해 서라벌 인근까지 침입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문무왕이 사후에 용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동해구(東海口, 지금의 감포)에 묻어달라고 했을까.

지금 국립박물관에서는 한일 고대 반가사유상 2점이 한자리에서 일반에 전시되고 있다. 양국의 반가상이 한자리에서 마주 보는 것은 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한국 반가사유상은 6세기 금동제품인 국보 제78호. 일본 반가사유상은 7세기 목조로 만들어졌으며 주구사(中宮寺)에 소장되어 온 일본국보다.

일본 불상의 육계는 동자상과 같은 쌍 상투지만 얼굴이나 옷의 문양은 한국반가상 양식이다. 인자하고 아름다운 모습도 매우 닮아있다. 이 불상은 나라(奈良)에 살던 백제의 후예들이 만든 것이다.

1500년 역사에서 한국과 일본은 가장 가까우면서 먼 나라로 각인이 됐다. 근세 일제강점기의 상흔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앙금으로 남아있다. 일본 극우 일부단체들은 한국을 비하하는 혐한시위까지 벌인다.

아름다운 미소로 마주하고 있는 양국 고대 미륵보살반가상은 지금 어떤 사유(思惟)를 하고 있을까. 양 국민들에게 역사를 일깨워주며 자비의 실천을 염원하는지도 모른다. 진정 일본인들은 미래 보살의 의미를 깨우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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