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한국 유학사에서 성인 공자·맹자·주자와 더불어 송자(宋子)로 지칭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 숙종 때 거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이다. 왜 우암은 조선 학자로서 성인(聖人)의 ‘子’ 반열로 호칭되는 것일까.

기록을 보면 우암이 송자로 지칭된 것은 정조(正祖)시기 왕명으로 그의 문집을 규장각에서 발간할 당시부터이다. 조선 왕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며 학구적이었던 정조임금은 우암의 학문과 사상을 성인의 반열에까지 높였다.

우암의 심오한 성리학의 세계와 국가관 인품 문학 등 모든 것이 망라된 송자대전(宋子大全)은 우선 방대함이 한국 유학사에서 전무후무하다.

가장 많은 분량이며 이를 찍기 위해 각자한 판각의 매수도 5000장에 이른다. 규장각에서 각자한 송자대전의 판각은 그가 22년간 후학을 가르치고 의리를 실천하며 사상을 집성한 화양동에 보관되었었다. 그것이 순종황제 말년 화재로 소실되어 사라졌으며 지금 대전 남간정사에 소장된 것은 1927년 후손과 유림들의 발주로 재 판각된 것이다.

괴산 화양동은 우암의 별업(別業)이다. 벼슬길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주로 저술과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을 말한다. 선향이 대전 회덕 송촌이며 옥천 외가에서 출생한 우암이 왜 화양동을 택한 것일까. 화양동은 그가 실천하려 했던 주자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적지였기 때문이다.

화양동은 청주시 인근 산동(山東) 마을의 동쪽이다. 산동과 청주라는 지명은 고려 초기 태조 왕건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우암이 이곳을 사랑한 것은 바로 공자의 탄생지가 중국의 산동이며 산동 안에 청주라는 도회가 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속설에 우암은 산동에 살던 고령신씨들에게 화양동 별업과 산동을 바꾸자고 했다는 일화가 내려오는 것을 감안하면 우암의 산동에 대한 지향을 알 수 있다.

우암은 화양동에 살며 첨성대 절벽에 그의 이상세계를 각자했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친구 노봉(老逢) 민정중(閔鼎重)에게 부탁하여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친필을 구해달라고 한다.

의종이 쓴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얻은 우암은 이를 바위에 각자했다.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이 명구는 바로 우암의 예관을 대표하는 것이다. 또 임진전쟁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선조임금의 글씨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얻어 절벽에 각자했다.

우암이 화양계곡에 구곡을 붙인 것은 정신적 스승인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따르려한 것이다. 자연에 구곡을 명명한 것은 순리대로 천하가 잘 다스려지기를 기원하는 천하관과 정치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우암은 ‘정직’을 선비가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제왕도 항상 공부하고 수기해야 함을 역설했으며 만인의 모범이 돼야 함을 강조했다. 학문을 숭상했던 정조가 우암을 지극히 존경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우암을 중국 사대의 대표적인물이라고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암을 제대로 봐야 한다. 반문화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식이나 조선을 도아 준 명나라에 대한 대쪽 같은 의리사상을 실천한 학자는 드물다.

우암은 효종과 더불어 북벌계획까지 세운 장본인이다. 한말 대표적인 의병장들이 우암을 의리의 대명사로 지지하며 거병한 것을 보면 그의 정신이 사대적인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선생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명적(名蹟) 화양동은 한국에서 제일 먼저 명승고적으로 지정되었다.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표적 자연유산이자 역사문화유산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고장의 유적이나 자연자원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이 유행이다. 차제에 한국의 대표적 명승고적 화양동이 누락 돼서는 안 될 것이다. 괴산군과 충북도, 학계의 적극적인 대응을 당부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