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독립투사(11)

▲ 한지 김상옥 의사. (사진제공: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항복하라! 항복하고 나오면 목숨은 살려 준다. 계속 저항하면 너만 손해니 어서 항복하라!”

1923년 1월 22일 이른 아침, 효제동 73번가 일대는 일본 경찰 병력 1000명, 근접 포위가 무려 500명이 배치돼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규모 병력을 배치시킨 일본 경찰이 잡고자 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당시 혈혈단신으로 1000여 명의 일경을 맞선 용맹무쌍한 조선의 남아는 바로 독립운동가 한지(韓志) 김상옥(金相玉) 의사였다.

“전원 사격! 피융~ 타탕~탕탕탕!”

일경에 의해 일제히 사격이 개시되자 효제동 일대는 물론, 서울 장안의 싸늘한 겨울 아침 공기는 전쟁터를 방불했다. 3시간 동안 지속된 이날 효제동 총격전에서 김 의사는 일경 15명 이상을 처단했다. 말 그대로 일당백(一當百)의 대 혈전이었다.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남은 총탄 세발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님이 내게 뜻을 주지 않는구나. 나 김상옥은 민족의 원한을 풀지 못하고….”

“탕!”

서울 한복판에서 단신으로 수백 명의 무장 경찰과 3시간이 넘게 싸워 15명의 사상자를 내고 총알이 떨어지자 김상옥 의사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에서 출생한 그는 독립운동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17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면서 부터다.

“일본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는 우리 것을 써야 합니다. 두고 보시오. 왜놈들이 우리의 혼까지 빼앗을 것이니 정신 차려야 합니다!”

당시 영덕철물상회를 운영하던 그는‘말총모자’를 만들어 일본 상품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또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인 4월 1일 밤, 동대문 장로교회 근처에 살고 있는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 모여 윤익중(尹益重), 신화수(申華秀), 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행해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혁신공보를 만들어 배포한 일로 일경에 체포돼 40여 일간 심한 고문을 당했다. 
 

▲ 서울 동숭동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안에 있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 (사진제공: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 적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 의혈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계획했다.

하지만 암살계획은 일경에 작전이 노출돼 동지들이 체포됨에 따라 홀로이 상해 망명길에 나섰다.

그는 상해에서 임시정부 요인인 김구·이시영·조소앙 등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조국독립을 위한 의혈투쟁 의지를 키웠다.

이후 김 의사는 1923년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총독주살 및 총독부 폭파에 대한 협의 후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권총 2정, 신익희로부터 권총 1정, 임시정부 등에서 폭탄 및 실탄 800발을 받아 안홍한(安弘翰) 등을 대동해 국내에 잠입했다.

특히 김 의사는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 본거지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해 일경 및 일본기관지 매일신보 사원 등 10여 명의 중?경상자를 내며 일제(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하지만 일본경찰은 17일 새벽 5시경 김 의사의 은신처에 20여 명을 기습공격을 벌였고, 김 의사는 당시 벌어진 총격전에서 4명을 처단했다.

이후 그는 일본 군경 500여 명이 에워싼 대설 쌓인 남산을 거쳐 왕십리 안정사에 이르러 이곳에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18일 이모집에서 유숙한 후, 19일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한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마지막 은신처에서 일경에 발각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구본웅 화백의 김상옥 의사 회고 작품.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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